#18. 답습 or 혁파

그 길을 가느냐, 다른 길로 가느냐 그것이 문제다

by 꿈꾸는 카프카

1) 답습 (踏襲)

- 예로부터 해 오던 방식이나 수법을 좇아 그대로 행함


2) 혁파 (革罷)

- 묵은 기구, 제도, 법령 따위를 없앰



요 며칠, 나는 계속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의 나는 현재의 나 그대로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계속 방황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방황에는 과거의 실제 내 주변 인물들이 등장해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인물들은, 과거에도 그랬듯, 꿈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를 압도적으로 움츠러들게 하거나,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모양새로 등장했다. 이에 꿈속에서의 ‘나’는 딱하기가 그지없게도 그들 앞에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혹은 그들의 위압에 어디 구석 한편에 잔뜩 찌그러져 있다가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답답한 상황 속에 갇혀있다가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어김없이 나는 내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바보, 등신………’

나는 왜 꿈에서조차 그들 앞에 당당하지 못한가. 어떤 두려움이 이토록이나 오래 나를 옭아 매고 있는 걸까……….


내가 존경하는 성직자 한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자녀들이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기거나 함부로 대해선 안된다.’

지금도 물론 완벽히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신에 대해 그 어떤 관념도, 인식도 지니고 있지 못하던 그 어린 시절부터 내겐 어렴풋이나마 신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마음 하나가 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마음 아프게 하지 말기’

세상에 나와 나의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을 때, 내가 기억하는 내 최초의 지상에서의 경험은 온갖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는 육탄전의 현장이었다.

곱고, 우아하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과 시각 현상들이 내 앞에 펼쳐졌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신은 내게 그런 가정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이 뭔지도 제대로 모를 어린 나이부터 나는 나를 둘러싼 험악한 말들과 표정 속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내 앞에 주어진 날들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 지난하고 고단했던 시간들은 내게 중요한 삶은 지침 같은 것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건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함부로’란 상대에게 행하는 말과 행동 심지어 표정 짓는 것 하나까지도 일일이 다 포함하고 있었는데, 나는 성장해나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이(대부분의)들에게 이 지침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내가 먼저 호의를 베풀고, 내가 먼저 예쁜 말을 하고, 내가 먼저 선의의 마음을 표현하면 상대도 나의 진심을 알아채고 나에게 분명 그만큼의 선의를 보여주리라 믿었던 마음들.

허나 그 마음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순진한 나의 착각과 어설픈 추측이었다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나씩 깨달아 가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도 내 안에는 그 당신 누구에게도 당당하지 못한 채 움츠러들어있던 마음들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불쑥불쑥 나의 현실에 등장해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의 지난날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다시 내가 유년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과거의 내가 그랬듯 차라리 내가 상처받는 편을 택하지,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과 행동을 취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그 때문에 지금의 내가 알 수 없는 심신의 병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해도. 나는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삶을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두 눈 감게 되는 날.

나지막이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당신들의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꽤나 오랫동안. 나는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그 세상에서 적잖게 고통받으며 숨죽여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내는 내가 승리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결국엔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짧지 않은 생애 동안 나는 내내 고민해오며 살아왔습니다.

잿빛만이 가득한 이 생에 내가 내던져진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답은 가깝고도 먼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건 바로 당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내는 것.

그곳 하나를 이뤄내기 위해 나는 멀고도 험난한 이곳에 던져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나 긴 터널을 지나,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승리했다는 것을요. 그리고 이겨냈다는 것을요. 이제, 나는 당신들의 세계가 아닌 나의 세계를 찾아 떠나갑니다.

한 치의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날 수 있어 지금 이 순간 너무도 행복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당신들을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악독하고도, 잔인했던 당신들이여.

이제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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