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나를 안아주는 시간
결핍(缺乏)
명사
1.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2. 다 써 없어짐.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의 나는 현실세계에서는 그야말로 꿈도 못 꿀 일들을 자유자재로 해낸다.
현실세계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아이스크림을 먹고, 라면을 먹고,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기도 한다.
그뿐이랴. 꿈에서 나는 여느 여자들처럼 화장도 하고, 하이힐에 치마도 입는다. 그리고 그런 차림으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며 다닌다.
그런데 그런 내 꿈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꿈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때로는 ‘나’가 아닐 때도 있다)가 늘 어딘가가 불안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라면을 먹다가도 갑자기 체해서 입에서 꾸역꾸역 다시 그것을 게워내려 애쓴다든지, 예쁜 하이힐을 신고 걸어가다가도 갑자기 굽이 부러져 다리를 삐기도 한다. 아마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잠재한 불안감이 무소불위의 공간인 꿈의 영역에 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그런 일이 몇 번씩 반복되다 보니, 언제부턴가 꿈이 중반 즈음에 접어들었을 때쯤엔 나 스스로가 이미 그것을 먼저 알아채고 꿈속 주인공인 또 다른 나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어서 빨리 해버려. 얼마 안 가 곧 산통이 깨질 테니깐.”
‘꿈은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라고 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나는 그렇게 매일매일 나의 무의식의 세계와 마주한다.
때로는 눈앞에 그려지는 그 무의식의 세계가 너무도 선명해서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그 여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한참을 허덕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꿈이라는 것이 100% 만족스럽다거나 혹은 그것이 마냥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내용의 것들인 것만은 아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야 50:50? 꿈의 반은 제벌 황홀하기도 하며 그리운 것이기도 하며 신나는 것들로 펼쳐진다. 반면 나머지 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잔인하며, 가히 절망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들로 이뤄져 있다.
그나마, 나를 조금이나마 꿈꾸고 싶게 하는 앞의 내용의 꿈들마저도 그 끝은 늘 ‘성취 부족, 방해물 등장, 예상치 못한 반전’등으로 인해 내가 원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나에게 선택권을 줄 테니 잠들어 있는 것과 깨어있는 상태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일체의 고민도 없이 전자를 택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미완의 드라마라 할지라도 내게는 현실세계에서 보다는 그나마 꿈의 세계 안에서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 ‘꿈’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꿈에 관한 일기’를 작성해보라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평소에 유독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이고, 자신의 숨겨진 마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면 자신이 꾸는 꿈의 내용을 일기처럼 기록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꿈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꾸는 데다가 불면증까지 심해 꿈에 관한 기록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 달치 가량의 기록 속에서 나는 내 꿈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테마를 발견해 낼 수가 있었다.
‘결핍’
꿈의 모든 스토리는 저마다 양상만 다를 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가 느껴왔던 결핍에 관한 것들과 연관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테면 꿈속에서 나는 아주 활기차고 밝은 소녀로 등장한다. 그리고 나에겐 다정하고 멋진 엄마, 아빠가 있다. 나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만한 좋은 집에 살기에 그 집에선 흉가에서나 나올법한 바퀴벌레 따윈 찾아볼 수가 없다.
조금 더 가벼운 내용으로 가본다면...
꿈에서의 나는 찰랑찰랑하고 긴 생머리를 가졌다. 키는 적당히 큼직하며 오뚝한 코를 지니고 있다. 내가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나에게로 쏠린다.
조금 더 신나는 것들이라면...
꿈에서의 나는 건장한 남자로 등장한다. 건장할 뿐만 아니라 능력자에 돈도 많다. 취미는 등산이고, 내 옆에는 예쁜 여자 친구도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을 현실세계에서의 헤어진 내 전남친이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매일매일의 꿈속에서 나는 10살 어린 여자아이가 되기도 하고 20살의 대학 새내기가 되었다가도 30대의 건장한 남자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꿈속에서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든. 그곳에서의 ‘나’가 진짜‘내’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 저편의 또 다른 ‘나’가 이미 알아채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꿈을 바라볼 때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을 관람하듯 관찰자 시점이 되어 내 앞에 펼쳐지는 스토리를 감상한다.
그래. 나는 내 꿈의 세계에서 주인공임과 동시에 관찰자인 것이다.
그렇게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하며, 감독까지 한 영화를 한편씩 관람하고 극장에서 나올 시간이 되노라면, 이상하게도 나는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들곤 한다.
그 ‘서글픈 마음’은 다소 복잡한 감정들로 뒤섞여 있곤 하는데, 우선은 영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에 관계없이 영화가 끝났다는 그 자체가 나를 서글프게 만든다. 다음으로는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의도치 않게 내 지난날들의 결핍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또한 나를 슬프게 만든다.
이제는 다 잊었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상처, 결핍의 조각들이 그 어느 것 하나 사라지지 않고 내 무의식 저편 어딘가에 콕콕 박혀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 내 꿈의 무대를 활보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데 그 사실 자체가 나를 조금은 우울하게 만든다.
한없이 외롭고, 마냥 약하기만 했던 시절의 ‘나’와 다시 마주한다는 것.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기만 했던 시간들로 다시 돌아가 존재한다는 것.
힘들기만 할 것 같은 그 시간들이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예전 현실 속의 ‘나’가 그 폭풍의 시간들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저 무기력한 존재이기만 했다면, 지금의 꿈속 세계에서의 ‘나’는 더 이상 그렇게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그 모든 시간을 지나왔기에, 그 모든 경험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냈기에, 그 시간을 견뎌낸 ‘나’는 더 이상 세상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게 되었다.
누군가가 짜 놓은 말도 안 되는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만 같았던 지난 시절.
이제 나는 꿈속에서건, 현실에서건 가능한 한 이번 드라마의 각본, 연출, 주인공은 모두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펼쳐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꿈에서 지난날의 ‘결핍’으로 무장한 ‘나’와 다시 조우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전처럼 마냥 서글프게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혹, 상처받고 갈 곳 잃어 방황하는 그때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오히려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여 포근히 그를 안아 주고 싶다.
“어서 와. 오래 기다렸어. 내 손 잡아. 이젠 내가 너의 곁에 있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