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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린이맘 May 19. 2022

감성 없는 새벽일지라도

어느 지친 새벽날에


새벽에는 감성이 없다. 새벽에도 우는 아이를 달래고 수유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재워주는 모성만 있을 뿐. 모두가 잠든 새벽. 한 줄기 빛에 의지한 채 아이를 돌본다. 누가 새벽이 고요하다고 했는가. 새벽에 우는 아이를 달래고 돌보는 지난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행여 누군가의 잠을 깨울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온다.


살면서 밤을 새운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시험 전 날에도 잠을 잘 자야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신념에 따라 열 시가 되면 잠을 잤다. 벼락치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을 새우기 싫어 시험공부도 미리 했다. 그 새벽이 그동안 학습한 내용을 따라잡을 만큼의 위대한 시간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밤을 새울 바에는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을 택했다.


새벽이 싫은 이유를 꼽자면 불편함 때문이다. 누군가의 잠을 깨울까 살금살금 걷고 최대한 소음을 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하다. 특히 조심성이 없는 나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다. 불편한 새벽이 지속되면 삶의 피로도 또한 증가한다. 천국이라는 조리원에서는 알람까지 설정해가며 세 시간마다 유축을 했으니 억지로 새벽과 가까이 지내야 했다. 집으로 아이를 데려온 후에는 언제 아이가 깰지 몰라 항상 긴장하며 대기해야 했다. 울음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아이부터 살폈다. 어떤 날은 차라리 새벽을 건너뛰고 아침이 찾아오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빈 적도 있다. 새벽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새벽은 어두운 터널 속 빛이 하나도 없는 곳을 혼자 걷는 느낌이다. 아이의 울음과 왜라는 물음 사이에서 이성과 모성을 잃지 않으려 간신히 몸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나날들. 새벽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고 지치고 힘들다.


오늘 새벽에는 유독 아이가 보챘다. 자다가 깨서 자꾸 울었다. 안아서 달래주고 눕히면 다시 또 울고. 결국 거실로 나와 아이를 가슴팍에 올려놓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제법 커진 아이의 무게만큼 쏟아지는 압박과 피곤함을 견디는 것이 이 새벽에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재워야 하나. 한없이 불쌍하고 초라하다. 하지만 가까스로 되찾은 새벽의 고요를 깨트릴 수 없다. 그저 이렇게라도 아이가 푹 자기를 바라는 수밖에….


답답한 마음에 베란다를 바라본다. 창문 너머로 몇몇 불이 켜진 집이 보인다. 나처럼 아이가 보채서 새벽에 깼나? 출근을 준비하는 건가? 밀린 과제를 하나? 시험공부를 하나? 정답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지만 그들의 사연을 멋대로 생각하는 재미가 있다. 새벽에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기분이 든다. 불빛은 밤하늘에 드문드문 반짝이는 빛나는 별 같았다. 새벽을 밝히는 별. 잠시 불빛을 가슴에 품고 숨을 고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벽에 기댄 채 아이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진정이 된 아이를 침대에 다시 눕히고 거실로 나왔다.


아까 불이 켜져 있던 집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베란다로 가까이 간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불이 꺼진 집도 있고 새로 켜진 집도 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으나 이유가 어찌되었든 그 불빛은 지친 마음을 잠시 기대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갑자기 마음에 탁 불 하나가 들어온다. 켜진 불 하나가 발을 붙잡는다.


지금은 새벽 네 시.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없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잠이 오지 않는다. 툭. 현관에서 소리가 난다. 아마 새벽배송으로 시킨 물건이 도착한 모양이다. 새벽배송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키워나갔을지. 깜빡하고 사지 못한 아이의 분유와 기저귀부터 밥상에 올라갈 두부, 계란까지. 택배를 열어보는 재미는 아침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되었다. 누군가의 아침을 위해 새벽을 여는 사람. 그 수고 덕분에 행복한 아침을 열 수 있음에 감사함이 든다.


돌이켜보면 나의 아침은 수많은 사람들의 새벽을 빚지고 빛을 밝힌 것은 아니었을까. 아파트를 지키는 경비원아저씨. 새벽부터 도심을 달리는 지하철과 버스.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 어둠을 밝혀주는 가로등까지. 이 모든 것들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일 테다. 또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새벽 네 시 반이면 새벽기도를 드렸던 엄마. 삼십 분 정도 기도를 하고 다섯 시부터는 아침을 준비하셨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다며 매일같이 차려주셨던 아침밥. 방 문틈 사이로 빛이 들어올 때면 달콤한 잠을 방해하는 불빛이 야속했었는데…. 가족을 위해 새벽 불을 밝히는 것이 엄마의 일이었음을 엄마가 된 지금에야 알 것 같다. 한평생 새벽 여섯시면 출근하셨던 아빠. 부모님의 새벽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누군가의 새벽에 빛을 밝혀주는 일. 누군가의 새벽에 맑고 투명한 이슬을 놓아주는 일. 새벽에 또 다른 말은 가족의 사랑과 희생이 아닐까. 아이와 고군분투하며 보낸 나의 새벽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이는 한 뼘 더 자랐을 테고 그 성장은 나를 기쁘게 할 테니. 새벽을 마주하는 일은 꽤나 서글프고 쓸쓸하지만 어쩌면 다른 누군가도 나의 불빛을 보고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와 새벽을 맞이하는 건 인생에서 얼마 안 되는 순간일지 모른다. 앞으로 마주할 새벽이 어쩐지 더 귀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일지도. 마음 속 어둠을 조금 내몰고 더 따스하고 부드럽게 아이를 달래주고 아껴주어야지. 그동안 빚진 새벽을 푸근하게 보듬어주는 마음도 함께. 오늘은 새벽을 마음에 품고 아침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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