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사람.

by 초록글씨

축축 늘어지는 계절, 끈질기기도 하다.

지치지도 않는지, 아이들은 제법 여름을 잘 버틴다.

물에서 놀면 그만이다.

구명조끼며 튜브를 널고, 다음날 등원 할 아이들 준비물은 없는지 다시 한번 체크한다.

야호!

(엄마는, 좋은데.)

"엄마 내일 학교 가야 해?"

"벌써 일요일 끝났어?"

"학교 가기 싫어"

(안돼 안돼 안돼 가야지, 엄마가 큰일 나.)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다시 여름방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딸에게 겨울방학이 두 달이니 조금만 참으라고 애써 위로했다. 했지만, (말이 되나요? 두 달은 조금 심한 거 아닌가요? 저는 어쩌라고요?) 어쩌겠나, 마음을 비워야지. (비워둔다.)

학교 일정에 따라 학교장 재량으로 방학을 정한다고 하니.(정말. 두 달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힘든 아이들은 겨우 눈을 뜬다. 등원 준비 시간은 특히 빠르게 흘러간다. 아이들 상태는 활기찬 시계와 다를 때가 많다. 그래도, 기특하게 신발 신고 밖으로 나간다. 어린이집 차에 탄 둘째와 인사하고, 첫째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다.

출근하려고 나서는 사람들, 아이들 틈으로 월요일 아침부터 딱 봐도 부부 관계는 아니다 싶은 50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지나간다. 그것도 이 아침에,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심지어 남자는 쌍시옷 욕을 하며 지나간다.

(아 아저씨! 아이들은 보이지 않나요?)

무슨 일이 있길래 화가 나있고 술을 그렇게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엔 그냥 정신 나간 사람 둘이다. 딸을 보내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아빠가 생각났다. 한참 자유를 즐기던 그 시절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새벽녘에 들어가기도 하고 날을 새기도 하고. 그때 내가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엄마한테 화를 냈나.. 난 아직도 의문이다.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이제 와서 물어볼 수도 없겠지만, 아무리 그때 내가 힘들었다 한들 아빠 눈에는 그냥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다고 생각했겠지. 그랬다.

그리고 어쩌면, 만약 내 눈으로 아들 딸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멀리 갔다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쓸데없음'이라고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어떡해야 하나요? 물어보고 싶었다.

사람을 통해 나를 본다.


시대가 정말 많이 바뀌었구나 느낀다. 중학교 복도를 지나가다 남학생 여학생이 아무렇지 않게 무릎에 앉아서 노는 모습을 본다고.(학교에서? 선생님 하기 정말 힘들겠단 생각이 든다.) 엄마 아빠 아들 딸이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운다는 이야기. (성인이 되었으니 그럴 수 있다. 있나? 그렇다 치자고, 이해해 보려 해도.) 문제는 그런 행동들이 무방비로 받아들여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질어질하다. 경계를 넘는 행동이 경계를 넘는 생각을 만들고 또 만들면 어쩌나 싶다. 과거와 현재, 어제와 오늘은 늘 반복되고 변화는 당연하겠지만 이로 인한 격세지감을 느낄 때면 아이들은 꼰대스럽다고 생각하겠지!

벌써, 나도 그럴 나이가 되었나?

(물론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젊은 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사람 대 사람으로 벽을 두지 않고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서.)

얼마 전, 나보다 젊어 보이는 엄마와 아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들에게 "내가 그래서 너 싫어하는 거야" "꺼지라고"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 얼마나 말을 안 듣겠나. 남일이 아니다 싶은데 또 엄마는 욕을 여러 번. 장난스럽게 넘어갈 뉘앙스의 비속어 정도도 아니고, 얼마나 힘들면 저러나도 싶지만.

어디까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싶다.

나는 완벽하지 않은 엄마이고 누구나 그러하듯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만,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




통화기록을 보다 보면 웃음이 날 때가 있다.

AI가 정리해 준 메모는 '반듯' 하다. (그래서 웃기고, 감정 없는 사람 같다.) 가끔 어제 일도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간단하게 요약된 내용을 보고 그날의 일들을 떠올린다. 고맙기도 하다.

'백숙과 순대를 둘러싼 끝나지 않는 메뉴 논쟁'을 보고 논쟁을 했다고? 살펴봤다. 그날 저녁에 백숙을 해주기로 했는데, 퇴근하고 돌아오는 그에게 다음날 해주기로 하고 딸이 먹고 싶어 하는 치킨 먹을까? 다른 거 먹을까? 그런 대화였는데 AI가 논쟁으로 기록했다. 남이 보면 먹을 걸로 다투고 열띤 논쟁을 했구나 싶겠다. 문득, AI로 글쓰기는 어떨는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사람의 감정선을 디테일하게 따라 가는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손그림을 고집해 오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기계적인 창작물은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지브리 작품 '털벌레 보로'는 생명존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AI를 통해 학습된 CG를 거부했고, 한정된 CG만 사용했다. AI에 대한 적대가 아니라 창작 활동에 임하는 철학의 문제였다. 챗GPT로 지브리풍 그림 만들기가 유행이고, AI 기술은 지금 경제 시장에서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견뎌내던 '라즐로'에게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이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제안한다. 냉혹한 현실 속에 목적지를 향해 무너지고 견디는 삶을 살아가는 라즐로.


해리슨: 왜 건축을 택했죠?

라즐로: 세상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설명이 안 돼요.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걸 만드는 거죠.

전쟁은 참혹했지만

그럼에도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제 프로젝트의 상당수가 살아남았어요.

아직도 그곳에 있다고요. 그 도시에.

유럽의 끔찍한 비극에 대한 부끄러운 반성이 끝나면 그 비극은 오히려 정치적인 자극제가 되어 또 다른 역사적 변혁의 불씨가 될 겁니다.

그런 일은 늘 반복되죠.

분노와 두려움은 이제 하나의 상징적인 유행어가 될 테고 그런 사소한 농담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넘치겠죠.

하지만 제 건물들은 다뉴브 강변의 침식을 견딜 수 있게 설계 됐어요.

남들이 아무리 삶을 유린해도 중요한 건 목적지이지.


영화에서 악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해리슨)은 쓰러져 있는 라즐로에게,

왜 당신네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학대하지?

핍박받는다고 분노하면서 왜 핍박받을 짓을 하냐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삶을 허비하면서 남의 온정에 의지해서 기생충처럼 살면 어떻게 어떻게 인생이 달라질 수 있겠어?

당신은 그 엄청난 잠재력을 스스로 죽이고 있어.


남들이 아무리 삶을 유린해도 중요한 건 목적지이지.


아름다운 영혼, 아름다운 이름. 그런 사람으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끈질기게 나타나는 모기도 생명이 다하기 전까지 활기치고 다니는 마당에.


쉽게 물러서지 않는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