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간간이 불지만 숨은 쉬는 건지, 목으로 등으로 땀이 흐른다. 발을 씻으려고 줄 서있는 사람들 사이로 화장실이 급한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갔다. 가기는 하는 건지, 가까워 보이던 길은 한참이다.
그는 아들을 안았다.
내 손을 잡고 걸어가던 8살 딸은 "너 나중에 신혼여행을 갔어. 여자가 너무 좋다고 뛰어가는데 모래가 있었어. 싫다고 쳐다만 볼 거야?" (하필, 그 예시는 웃기기도 하다.) 벌써 성인 남자가 돼버린 동생을 걱정하며 놀리는 누나.
화장실 다녀온 아이는 이번엔 바닥에 모래가 많았다고 발을 닦아달라고 한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발을 씻기고 다시 품에 안고 주차한 곳으로 걸어간다.
(놀러 온 거 맞아?)
맞다.
우리는 지금 놀러 온 게 맞나 싶다.
두 시간 전, 속초시장에 들렀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딸은 머리가 아프다 속이 안 좋다 속 시끄러운 소리를 한다.(심하게 체한 이후로 조금이라도 목에 뭐가 걸린 것 같거나 마음이 불편하면 진짜인지, 걱정인지, 그런 척하는 건지.) 응석 부린다. 지금 그는 힘들게 주차를 했고 무지 배가 고픈 상태고 체력이 약한 아들을 업고 화를 참는 중이다. 빠르게 장소를 옮겨 밥을 먹고 나면 나아지겠지 생각하고 가까운 밥집에 들렸고 딸아이는 그 냄새가 역하다고 난리다. (바다 온 김에, "속초시장 안 간 지 오래됐어" 가자고 말했던 나는 살짝 눈치가 보인다.) 징징대던 딸아이와 미운 날씨는 땀과 한 몸이 된다.
근처 식당을 검색하고 시장통을 벗어났다.
오 마이갓!
사람들 줄이 보이길래 나는 또 눈치가 보인다.
화를 꾹꾹 참고 있는 게 보인다. 그가 그러다 화를 내면 딸은 또 토라지고 울고 다시 원점이 되고 날은 덥고 이 모든 게 다 힘들어지므로.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고 길게 기다리면 바로 주변 식당으로 가야 한다. 다행히 금방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번호표를 뽑고 시원한 2층에 앉아 기다렸다. 그 사이 그는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아마 화를 삭이러 가는 길인가?
딸은 떡만둣국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얄미울 정도로.
(그 난리를 피우고서) 말이 되니?
매끄러운 바다 위를 떠다니던 아이들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분 좋았던 웃음소리, 머리 아팠던 잡음이 쨍한 햇볕으로 일렁이던 아침 파도와 함께 떠내려 간다. 입을 다물고 창밖을 보니 빠르게 스치는 나무들, 구름이 조용히 움직이다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곤히 잠든 아이들,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갈길이 멀다.
발아래 모래 사이로 끊임없이 물이 스며든다. 발아래 곱고 따뜻한 모래가 다시 여름 바닷가로 데려왔다. 모래 위 그늘막을 만들고 장난감을 한가득 펼쳤다. 아이들은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그고 손으로 만져 보다가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한다.
아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품도 몸에 닿으면 간질간질하다고 싫어한다. 태생적으로 피부가 예민한 것도 같다. 돗자리로 걸어오는 길 발에 모래가 묻었다고 다시 바다로 가는 아들. 발을 씻고 조심조심 모래를 밟는다. 앞일만 생각하고 뒷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순간 이건 아니다 싶은지 다시 바다로 간다. 이내 데리러 오라고 손짓한다.
한참 장난감으로 모래 쌓기도 하고 성을 만들던 녀석은 무슨 이유인지 바다로 걸어 나와 발에 묻는 모래는 싫다고? 알 수 없다. 그저 그 모습이 웃기다.
한참 웃다가 찰나, 문제가 있나?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모든 행동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있다.(아이의 예민함은 타고난 것도 있고 생활하면서 만들어지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다시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걱정하거나 말거나, 잔잔한 파도가 다가온다.
잠시 생각도 잊게 만드는 좋은 소리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내 옆에 찰싹 붙어 바나나킥을 먹는다. 조그만 게, 먹는 입 웃는 눈이 있다는 게 귀엽다.
딸은 출렁이는 바닷물이 마음에 드는지 종일 나올 생각이 없다. 튜브에 몸을 맡긴 체 끝나지 않는 저 끝을 응시한다. 그는 옆 자리 청소년으로 보이는 아들과 딸이 엄마 아빠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자 우리에게도 저런 날이 올까 묻는다.
그런 날이 오려면 얼마나 무수한 시간들을 고통으로 보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 그때까지 무사할까? 한 거야? 짓궂은 생각이 든다.
평화로운 이 순간에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들.
그럼에도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다.
잔잔하게 들리는 파도도 멍하다.
잠 못 자고 불면증에 시달리던 시기가 있었다.
마치 모래 속으로 스미는 바닷물처럼.
바닷물은 깨끗하기라도 하지.
매끄럽지 않은 모래 안으로 흙탕물이 스미는 것처럼.
지금은 정화된 물이 흐른다. 그래서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는 편이고, 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도 세상모르고 잘 때가 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피폐해진 영혼이 제대로 숨은 쉬겠나?
건강하게 숨 쉬고 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끊임없이 걱정을 붙들고 그다음은. 그래서, 만약에 그다음은. 끊임없이 벌어지지 않는 일을 벌이고 짐작하고 내가 나를 힘들게 내버려 두었다. 지금은 그런 것은 미련하고 몹쓸 생각이란 것을 알고 나니 한결 마음이 좋아졌다. 경험한 만큼 나도 경험이 되는 것인지 안 그래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그래도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난다는 것.
'쓸데없음'을 휴지통에 버린다.
붙잡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쓸데없는' '도움이 안 되는' '피폐하게 만드는'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생각이 많다. 그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래서 나만의 취미를 갖고 쉼을 주는 장소를 찾고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연습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을 위로해 줄 수도,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아는 건 자신뿐이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처럼. 내가 만든 고통에서 자유로운 것도 나만 할 수 있으므로.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겠다. 깊이 있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어차피, 살아가는 건 고통이고 피할 수 없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도 됐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할 용기를 갖는 것이 좋겠다.
딸은 걱정이 많다. 걱정인형 같다.
만약 걱정이 생길 때마다 머리에서 잡초가 자라난다면, 다듬어 주지 않는 이상 무성하게 자라날 거다. 주변을 관찰하고 관심이 많고 궁금한 게 많다. 그래서 안 봐도 될 것들이 보이나 싶다. 얼마 전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 의자에 풀을 발랐고 그 광경을 본 거다. 슬며시 왜 그랬어? 물어보니 친구는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해서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그 의자에 앉은 친구는 선생님께 말했고, 의자에 장난친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고 한다.
딸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친구가 나한테 말했는데, 나는 가만히 있었다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냐고?
양심에 찔린다고 그 친구에게 말하라고 설득해야 하냐고? 오히려 많은 말은 아이에게 독이 될 수 있어 듣고 있다가 네가 잘못한 행동을 한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답해 주었지만 (어쩜 이리도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은 세계를 보는 듯한) 아 머리가 아프다.
앞으로 안 봐도 보이는, 이 아이의 고통을 봐야 하다니!
이 아이뿐인가? 사내놈은 어떻고!
결국, 알에서 깨어나는 건 내가 아니지 않나.
삶은 고통이 맞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도 됐지!
피하지 말고 마주할 때도 됐다.
연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