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신기하고도 웃긴 존재다. 반응하기 전에 눈물이 나온다는 게.
이 이상한 흐름은 알 도리가 없는데, 보는 것만으로 '그랬구나' 수긍하게 만든다.
누나가 안고 있던 인형을 안고 자고 싶은데, 누나가 주지 않네. 동시에 으앙 하고 눈물이 나온다. 즉각적이고 동시에 펼쳐지는 반응은 알 수 없지만 웃기다.
억울한 거겠지. 주지 않는 누나가 미운 거겠지. (사내아이 입장에서는 이성적 논리는 없다, 그 인형이 지금 내 손에 없는지가 중요할 테니깐.)
빨리 잠들고 싶은 딸아이는 성가신 눈으로 인형을 던진다.
감정이 없는 인형은 아프지 않다. 아기모형이 아닐지라도 울던 아이 가슴에 편하게 누워 숨 쉬는 인형이 된다.
엄마도 즉각적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좋겠다. 계산하지 않고 꺼내어 버리는 소금물을 흘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민망한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보다 작은 아이는 당당해 보인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되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니.
너 참 편하겠다.
영화 '만추'에서 애나(탕웨이)와 훈(현빈)은 영어로 대화하지만,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일을 이야기할 때 훈이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이야기한다. 훈이 알고 있는 중국어는 하오(좋다), 화이(나쁘다)뿐이다. 그녀의 방백에 귀 기울이며 '하오' '화이'로 호응한다.
말로 전부를 꺼낼 수 없어서 마음이 대신 말이 된다면 좋겠다 그럴 때가 있다.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듯 알아차린 것처럼, 때로는. 그런 위안 말이다.
설명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을 알아차릴 수도 없는 세계란 때로는. 슬픈 것일 테다. 처음부터 모르는 상태로 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테다.
한 해의 끝자락도 온 마당에 따뜻한 기운이 비치지 않아서, 또 하나. 일 년 365일 숨 쉬는 사람이 똑같은 페이스로 한결같은 심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그것이 꺼내 보여주지 않는 다른 면일지라도, 우리가 인식되어 보이는 면이) 신기해서 공공연하게 쓰고 싶었다.
쓴다는 건 사람을 좀 더 들여다보는 일이니깐.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 글을 보며 훈 같은 사람도 있겠지. 아닌 사람도 있겠다. 아니라면 애나처럼 방백이 아닌 독백이겠죠?
(미안합니다. 12월도 온 마당에, 가는 마당에.)
다시 돌아와 그런 사람들은 뭘까?
마음속에 무엇으로 가득 찼길래 하나의 심장으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어떤 경지가 유연한 사람이 되게 했을까?(그것이 꼭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 리더십으로 비칠 때가 있다.)
아이들만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딸아이가 들려주는 같은 반 여자친구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짓궂게 괴롭히는 친구에게 대차게 맞짱 뜨는 친구와 그런 일을 당할 때 주저앉아 우는 친구.
괴롭히는 친구는 맞짱 뜨는 친구를 보면 "쟤 또 나선다" 알아서 피한다고 한다.
"엄마 근데 우는 친구도 아이들이 함부로 못해" 그 친구가 울면 선생님이 왜 우는지 물어보기 때문이란다.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이들이 행할 수 있는 특권이겠지 싶다.
마음을 숨기는 일도 설명할 일이 많아지는 것도. 자신의 마음만 알아봐 달라고 아우성치지 않는 것도. 자신의 마음에 책임을 지는 것도. 각각의 마음이 소중한 것을 아는 것도.
마음이 나이 들어간다는 건 그런 것 아닐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아이만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을 듣는 나는 알겠다고 말하지만, 귀 기울이는 것이 좋을 거야 알아차린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선생님은 언제까지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골칫거리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골칫거리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는 언제는 당당하게 울고 싶기도 하다.
아침, 어린이집 차를 향해 뛰어가던 아이는 넘어지자마자 곧장 눈물을 흘린다. 넘어지면 사내라고 아프지 않은 척하면서 나에게 와서 아파하지만 이번에는 분해서 눈물을 흘린다. "누나가 뛰자고 해서 넘어졌잖아"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우선 웃기다.)
아무 잘못 없는 누나에게 화풀이한다.
넘어지자마자 억울한 거야? 아픈 거야?
동시에 눈물이 난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렇게 당당하게 눈물이 나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