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둑에 바람이 불어오면,
드넓은 억새풀 밭에 사사삭 소리가 흐른다.
사사삭-
사삭-
"코스모스야, 그렇게 단단한 줄기로 버티고 서서 바람을 맞는 기분이 어때?"
억새의 물음에 코스모스가 답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하늘하늘 거리는 억새, 네 모습은 평생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야."
실은 억새풀이 코스모스이고 코스모스가 억새풀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외형이 갖춰지던 순간부터 억새는 하루밤낮을 쉬지 않고 외쳐댔었다.
"나는 억새 싫어. 그 이름이 싫다고! 억새라고 부르지 마!! “
"그럼 억새를 억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까 “
늘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코스모스가 웃으며 물었을 때, 억새는 대답했다.
"코스모스라고 불러줘. 난 코스모스라는 이름이 좋아."
그날 이후 둘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갈색 뿌리를 깊숙이 땅 속으로 뻗어 내리고 꺾이지 않을 줄기로 꼿꼿이 서서 해가 뜨나 바람이 부나 코스모스의 곁을 지키는 억새는 코스모스로,
흰색과 분홍이 적절히 섞인 얇은 꽃잎에 노란 수술을 가진 코스모스는 억새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한 철을 보내어냈다.
"시원하다. 그치?"
억새의 옆에서 코스모스가 조용히 물었다.
코스모스는 늘 조용했고, 차분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환호할 때도 수줍게 웃을 뿐 과시하지 않았다.
이 방향이면, 이 방향대로.
저 방향이면, 저 방향대로.
각자 자기의 줄기로 서서 기대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는 코스모스.
억새는 자신처럼 깊이 뿌리내리고 있지 않은데도 자신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 코스모스가 좋았다.
"옅어지지 마."
코스모스의 질문에 억새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아름다워.'
그렇게 느꼈던 며칠 뒤부터 코스모스의 꽃잎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서리가 내릴 듯 날이 차가워질 때면 코스모스를 감싸듯 고개를 숙여 보호했고,
바람이 강하게 불 때면 꽃잎이 하나라도 떨어질까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잘조잘 재미난 이야기를 잘도 하던 억새는 여러 계절을 지난 이처럼 말수가 많아졌다.
그런 억새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힘을 주는 것은 언제나 소란하지 않은 코스모스였다.
"내가 만난 최고의 멋쟁이는 억새, 너야. 항상 활기차고. 의리 있고. 세상 누가 너보다 멋있겠니."
"너는. 무슨 그런 맞는 말을 앞에다 두고 해, 정말. 틀린 말을 하는 걸 못 봤다니깐."
장난기 넘치는 억새는 코스모스에게까지 그 기운을 전해주는 듯했다.
"조금 춥네."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옅어진 그녀의 꽃잎도 찬 바람에 하나 둘 떨어져 흩날렸다.
노란 꽃술이 드러나고
줄기의 색도 어제보다 검어진 것 같았다.
"네가 억새야. 알지? 우린 서로 이름 바꿨잖아. 억새니까 억새처럼 단단히 버텨야 돼."
"응 알지. 네가 코스모스잖아. 너처럼 하늘거리지 않는 코스모스도 없다니까."
웃었다.
함께 있을 땐 늘
웃을 수 있었다.
코스모스의 고개가 점점 숙여진다.
억새가 줄기를 기울여 받쳐주고 싶지만 코스모스는 힘없이 웃을 뿐이다.
올 듯 말 듯 애태우던 서리가 내리고,
억새는 은빛으로 색을 바꾸었다.
바람이 분다.
저 멀리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사사삭-
사삭-
말소리보다 작고,
새소리 보다 낮고,
하지만
가장 오래 귀에 남는 소리.
해 질 무렵이 되면
그 소리는 더욱 깊어진다.
떠나는 이를 말없이 보내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선 마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키는 소리
사-사삭-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데도
계속.
(끝)
부연:
코스모스는 한해살이 꽃으로 서리가 오면 꽃잎이 떨어지고 줄기가 변하며 조용히 사라짐
억새풀은 다년생으로 꽃도 풀도 아닌 마른몸으로 겨울을 버티고 다시 자라남
코스모스와 억새는 같은 공간에서 자라기도 함
아무도 울지 않는 이별을 선택하는 코스모스와 쓸쓸하게 계절을 견디어 내는 억새.
이름까지 바꾸며 운명을 바꾸려해도 자연의 순리앞에 사라지고 기억할 뿐... 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