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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의 헌신

여우비

by 아는개산책

연락도 하지 않고 들렀던 선배의 사무실 안에는 '이달의 실적왕' 1위에 당당히 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오빠. 꼭 이 얼굴을 넣어야만 했어?"

"허허, 그래야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지. 이런 외모도 영업 1위를 하는구나 하고"


대학시절 정. 부를 이뤄 학생회 선거에 출마하려 했던 나의 메이트 이자 존경하는 선배.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고 동시에 그를 필요로 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영업을 잘할 수 있어?"

"내가 항상 너한테 하듯이 하면 되지."

"잘 들어주는 거?"


그는 언제나 그렇다.

농담 속에 본질을 꿰뚫는 말을 한다.


"헌신하는 거. 내가 맨날 너한테 ㅈㄴ 헌신하잖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선배의 대답. 그리고,


"짜증 나게 하라는 거구나."

후배의 응석.



NO CHOICE


"김 과장, 오늘 시간 되지?"

먼발치에서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시간에 저런 질문이면,

그것은 접대겠다.


"네? 아... 부장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저, 아버지 기일이라.."


팀원들의 눈길이 김 과장에서 부장에게로 옮겨간다. 단체 미어캣들 같이.


"아 오늘이었나? 미안미안. 그럼.. 누가 되지..?"


여섯 시 되기 딱 삼십 분 전이다.

나는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치고 볼펜을 통 안으로 막 꽂으려던 참이다. 하지만 바로 다시 꺼내어 다이어리를 펼치고 뭔가를 적는 시늉을 한다.


"김대리"


"전 오늘 ㅋㅇ 팀장이랑 술 약속이요, 강남역까지 가야 돼요, 아, 차 엄청 막히는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낚시가 잘 안 되시네


"부장님, 어디로 가시는데요?"

김 과장이 외로운 부장을 달래 본다.


"그 ㅈㅈ협회 있잖아. 전에 친했던 상무가 이번에 다시 전시팀으로 돌아왔다고 먼저 전화했네. 잘됐지, 이번 전시회 입찰건도 물어보고."


"하. 그런 자리면 제가 가서 분위기 만들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부장님"


-쟤는 저런 말도 잘해. 난 죽어도 못하겠던데.


일일이 남직원들을 돌아가며 호명을 하는데 누구 하나 걸리는 이가 없다.


-끝까지 난 안부르네. 나야 땡큐지 뭐.


여자는 영업에 한계가 있다고 잊을만하면 상기시키는 부장이다.


"아... 고 과장밖에 없나."


드디어 내 이름이 불리지만 즉각 반응은 하지 않는다.


소심한 반항.


"고 과장, 고 과장은 술도 잘 못 먹잖아. 이건 술접대인데."


"네? 저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부장을 바라본다.


"여기 고 과장이 또 있어?"


"..."


"이거 중요한 거라 꼭 따야 돼. 하... 고 과장. 고 과장이라.."


고만 쫌 불러라. 정들겠다.



접대


돈이 흐르는 곳은 조용하고 적막한 탈을 써야 하는 건지.

고급스럽지 않은 나는 본격 접대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식집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다.


안내받은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부장은 먼저 신발을 휑 차버린 채 올라가고, 나는 마루 끝에 앉아 그의 신발과 나의 신발을 나란히 놓았다.


"이따 봐서, 나는 상무랑 좀 그런 얘기도 해야 하니까 분위기 봐서 중간에 먼저 가도 돼. 알았지?"


허리춤을 잡고 가슴까지 추켜올리며 부장이 얘기한다.


"네."

조용히 대답하며 미닫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돌아서려는 순간 문이 다시 한번 세차게 열린다.


턱-


"어휴,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필요이상으로 들뜬 목소리의 상무가 들어서자 그 뒤로 두꺼운 검은테 안경을 쓴 학자 같이 생긴 분이 하나 더 따라 들어온다.


"와, 안녕하세요 상무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앉을락 말락 하던 깃털 같은 엉덩이를 세우며 부장이 손을 내민다.


"네, 부장님,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 아 김 차장 인사해, 여기 김 부장, 처음 나 전시팀 있을 때 아주 우리 일 많이 도와주셨어"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시준 차장입니다."


어떤 인생인지 바늘 하나 들어가기도 힘들어 보이는 인상이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엉거주춤하던 나도 얼른 명함을 내밀어 본다.


"안녕하세요. 고우리 과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김 부장 팀에 여직원도 있었네. 하하. 앉으세요, 다 같이 앉으시죠."


상무는 명함을 보지도 않고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먼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곧, 음식 들여올까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의 담소가 오가는 사이에도 나는 나의 합석 목적으로 인해 머릿속이 분주하다.


-뭐라도 건지고 가야 할 텐데.


조바심을 내면 안 되지만, 무슨 여자가 영업을.이라고 입에 달고 사는 부장이 멋쩍게 술을 기울일 때마다 내 마음속의 안정도 금세 이탈해버리고 만다.


잠시 후, 연달아 울리는 문자에 부산스러워 보이던 상무가 아무래도 통화를 해야겠다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나갔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에 부장이 연신 헛기침을 해댄다.

괜찮은가 하는 마음에 부장을 쳐다보자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 끝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김 차장 쪽으로 향한다.


-나보고 말하라고?


(꿀꺽)


"저, 김 차장님 저희도 이번에 전시회 견적서 제출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술잔을 내려놓고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부장은 못 들은 척하며 술잔을 채워 혼자 술을 들이켜고 있다.


한번 더 용기를.


"저. 이번에 다른 업체도 많이 들어왔겠지요? 저희 가격은 어떤.. 편인가요?"


무례였나.


"지금 그 말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십니다. 과장님이라고 하셨나요?"


"네? 네.."


더욱더 쪼그라든다.

이러다 나는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입찰 심사자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 공정성을 깎아내리고 싶으세요? 고 과장님은 초등학교도 안 나왔습니까?"


촌철살인.


아무리 술에 취해도 빨개지는 일이 없던 내 얼굴은 그 순간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헛수고?


어제저녁 불편했던 기분이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초등학교 이후에 무슨 대화가 오갔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급한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겠다고 했을 때 김 차장은 내게 대답을 해주었던가?

다시 한번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닫힌 미닫이 문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신발을 내려다보았었다.


-먼지가 앉았네. 걷다 보면 사라질 줄 알았더니.


어디선가 묻은 하얀 모래알들이 구두코에 앉아있는 것을 보다가 가방 안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누나, 신발은 영업하는 사람 얼굴이야. 비싸야 하는 게 아니고 항상 깨끗하게 하고 다녀'


동생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때 했던 대답도 기억이 났다.


'꺼져'


앞 코를 닦아내고 고개를 숙여 신발을 신는데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낡은 남자구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유명 브랜드가 적혀 있는 고가의 검정구두가 상무의 것일 테고, 이 낡고 주름진 것은 고고한 김 차장의 것일 테다.


-아주 먼지가 소복하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다니나.


별 다른 생각 없이 구두를 집어 들고 남은 물티슈로 먼지를 모두 닦아 냈다. 그리고 덕분에 회색이 된 나의 손가락도 대충 닦고 그 자리를 떠났다.


"회사 가기 싫다고. 진짜로!"


회사 건물이 눈앞에 보이자 큰 소리로 외쳐본다.


지이잉- 지이잉-

휴대폰 소리.


내뱉은 말에 괜히 찔려 흠칫.

그러면서 휴대폰을 놓쳤다,


반사신경! 발등으로 받아야 해!

오른발을 급히 앞으로 내밀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오히려 발로 차버린 꼴이 되었다.


-개.망.


켜지지 않는 휴대폰을 탁탁 치며 사무실로 들어간다.


"고 과장"


자리로 들어서자마자 내 이름이 불린다.


착각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이름이 골백번 불려도 정들리 없어.


"네."

부장 자리로 가면서 대답한다.


"얘기 들었어? 그 전시, A 사가 될 것 같은데?"

"왜요?"


"뭐 위에서 압력이 와서 A사 입찰서류가 어제 추가로 들어갔대, 그런데 가격이 제일 낮아가지고 어쩔 수 없다 하네. 참나. 뭐 하는 짓들인지."


"네에? 마감시간 지났는데도요? 헐. 그럼 가격 다 알고 들어간 거네."

"다음에 더 잘 넣어보라는데. 어휴. 그래서 어제 상무가 돈을 냈나. 참나."


나는 부장 앞에 서서 고개만 끄덕인다.


"아, 뭐하고 있어, 이제 자리로 가서 일해"


"네? 네..."


-공정 어쩌고 하더니.


초등학교 타령하던 그의 눈빛이 까만 테 속에서 차갑게 비치던 생각이 떠오른다.



여우비_호랑이 장가가는 날


이런 화창한 날씨에, 한창 일해야 할 오후 시간에 사무실이 아닌 외부에 나와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탈출 같기도 하고.


사설 수리점에 휴대폰을 맡겼다.


-아, 돈 아깝다.


택시에서 내리며 나의 반사신경을 돌이켜본다.


투두둑.


오는 길엔 분명 반짝반짝 빛나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눈이 부시더만, 어느새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우비?


그리고 곧 굵은 빗방울이 되기 시작하자 나는 회사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로 사무실 가긴 아깝지.


그 와중엔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다.


그리고는 계산대 앞의 천하장사 소시지를 한 움큼 집어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늘은 다섯 개만.


소시지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고 편의점 밖의 지붕아래에 대로 멈춘다.

가만히 서서 떨어지는 비를 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몇 개 먹고 들어갈까. 다 먹고 갈까....


하는데, 회사 앞으로 택시 하나가 멈춰 선다.


-누군지 몰라도 갑자기 비가 와서 우산도 없겠네.


딱히 할 일도 없어 택시만 계속 쳐다보는데, 내리는 사람이 어디서 본 것도 같다.


"어? 안경인가?"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서류봉투를 가슴에 품은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굵은 검정테 안경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건 아닌데.. 정말 맞나? 그래도 이 동네에 쟤가 왜??


그도 나를 보고 놀랐는지 한번 움찔하더니 이내 편의점 안으로 뛰어오기 시작한다.


-오지 마, 오지 마! 왜. 왜


"안녕하세요. 고 과장님"


"아? 정말 맞네요. 차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과장님이 여기 계셔서 제가 더 놀랐는데요."


-응? 접대 자리 아니라고 말투가 사람 같아진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잠깐 볼일 있어서. 그런데 저희 회사 오신 거예요?"


"네, 과장님 뵈러요, 어제 마감시간 이후 들어온 서류가 있는데, 그게.. 흠. 저희도 들어오는 것까진 다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서 접수를 하게 됐습니다."


"네에."


거짓말은 안 하네.


"그래서. 흠. 그렇게 되면 다른 제안 업체 분들에게는 불공정한 게 되니까, 오늘까지로 마감기한을 연장하기로 했어요. 흠흠, 그래서 다시 제출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다시 내셔도 된다고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숨이 차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아, 네에. 그럼, 다시 낼게요. 그런데... 전화로 말씀하시면 되는데 굳이 여기까지.. 한 시간도 넘게 걸리지 않아요? 비도 오는데.."


"네, 출발할 땐 비가 안 왔었는데. 흠, 여하튼. 그리고 전화를 받으셔야 말씀을 드릴 것 아닙니까?"

"네?"


아... 휴대폰 고장...


"아니, 사무실로 하시면 되는 걸... 명함에 번호 있는데요."

"흠. 담당자가 고 과장님이시고.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냥 왔습니다."


말하며 발끝으로 바닥을 몇 번 톡 건드린다.

튀어오른 빗방울이 닿은 그의 구두가 깨끗하다.


-설마, 은혜갚는 까치야?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훑어보게 된다.


-좀. 친절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네. 감사합니다. 저 그럼 빨리 준비해서 넣을게요. 그럼. 택시 타고 돌아가시나요?"


"흠. 제가 어떻게 갈거까지는 아실 것 없으시고요."


"아, 네..."


비는 잦아들 생각을 안 하는데.

그래도 곧 멈추겠지?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만져본다.


-웩, 이게 뭔 짓이야. 협회 담당자 앞에서.

급하게 손을 거둔다.


몇 분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고 그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어색하지 않지?

어제같이 마음을 짓누르는 부담감도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에서 만나서 얘기하면, 이것도 불공정한 거 아닌가? 초등학교...?"


"흠. 저는 초 중 검정고시입니다."

"아, 네..."


뻘쭘한 마음에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소시지 한 움큼이 잡힌다.

별다른 생각 없이 소시지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민다.


"천하장사 좋아하세요?"


또 한 번 움찔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네, 좋아합니다."


우리는 소시지 하나씩을 오물오물 씹으며 조금씩 잦아드는 비를 쳐다봤다.


호랑이 장가가가는 날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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