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틈에 갇힌 감정
유명한 넷플릭스 DP2 에는 그런 장면이 나온다.
군대 내에서 괴롭힘 당하던 병사가 결국 총을 난사하는 장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야기와 그 사람의 어머니에 감정이 제대로 이입되고 만다.
하지만,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그저 총기 난사사건이 있었다는 뉴스만 보았다면,
그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그땐.
어떤 생각부터 하게 될까.
영업사원
"네, 네에. 바로 견적서 보내드리겠습니다, OOO 대리님, 감사합니다."
이름 세자를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김 과장을 돌아본다.
"방금 누구라 그랬어?"
"어? 아는 사람이야?"
전화를 끊은 김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회사 어딘데"
"ㅈㅈㅈ. 알아? 아는 사람이야? 고 과장 업체야?"
재차 묻는다.
"예전에 들어 본 적 있어."
나는 눈을 내리깔며 분위기도 깔았다.
"어어. 왜, 네가 진행할래?"
김 과장은 늘 명랑하다.
"됐어."
이쯤 되면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빨리 견적 나가야겠다. 다른데 전화 돌리기 전에"
벌써 엑셀을 열고 새로운 견적서를 만들 준비를 하며 그가 말한다.
영업인에게는 실적이 중요하지.
"그런 게 아니고."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1년 전
매번 묵던 숙소가 아니다.
출장비를 조금 더 아껴볼까 하여 프랑크푸르트 전시장에서 50분은 더 열차를 타야 하는 외곽의 한 민박집을 찾아냈다.
본관과 별관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나는 주인아주머니 내외가 있는 본관으로 요청을 해두었다.
"저희 집 아저씨가 요리사 출신이라 음식이 맛있어요, 아주 잘 오셨어요."
공항까지 픽업 나온 아주머니는 아우토반을 말 그대로 쌩쌩 달리며 친절하게 얘기했다.
시속이 140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죠, 본관으로 예약하셨는데, 원래 나가기로 했던 손님이 아직 방을 안 빼서, 내일부터 본관으로 오시고 오늘 하루만 별관에서 주무시면 안 될까요?"
"아.. 네, 별관은 본관에서 먼가요?"
"아니요, 바로 옆이에요, 옆. 걱정 마세요. 제가 다 가서 챙길게요."
도착한 숙소는 아주머니의 말과 같이 따뜻한 온기가 맴돌면서도 맛있는 냄새가 집 안 전체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장정 대여섯 명도 함께.
"인사하실래요? 저희 집에서 장기투숙하고 계시는 ㅈㅈㅈ 회사 분들이세요."
와.
그런 곳에 다니는 사람들이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한 거지.
증명이라도 하듯 한결같이 안경을 쓰고 있다.
여행지는 처음 본 사람들과의 긴장감도 쉽게 녹여버리는 특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배도 고픈 데다 낯선 땅에서 만난 한국인 무리라니.
사내 경험담과 짧은 여행지의 추억들을 꺼내놓는 그들의 입담도 회사 이름값 못지않은 듯했다.
독일 맥주는 종류를 떠나 다 맛있고, 요리사 출신 주인아저씨의 안주는 더욱 기가 막히다.
분위기에 취해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밤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는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더 놀고 들어가세요"
"아우, 왜에 더 마셔요."
딸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던 ㅈㅈㅈ의 우대리가 붙잡는 소리를 한다.
"아닙니다, 너무 피곤해서요. 재밌었습니다. 다음에 또. 헤헤"
주인아주머니 아저씨는 본관에서 머무시고 별관은 이렇게 잠시 민박하는 사람들의 방으로만 차 있는 3층의 집. 그것이 조금 불안했다. 혼자 여성이라는 게.
방문 바로 앞에 위치한 작은 간이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지금까지 출장을 다니면서도 문을 잠그는 습관은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노트북을 연결하고 침대에 엎어진 채 기내에서 보다만 미드를 틀었다.
미드가 없었으면 이 많은 해외 출장 어쩔 뻔했어.
마음은 콩밭이다.
그때였다.
똑똑-
(응? 잘못 들었나?)
똑똑-
(아주머니신가?)
문을 열지 않고 먼저 대답부터 한다.
"네?"
"문 좀 열어주실래요?"
"누구세요?"
"저요, 아까 같이 술 마신 우대리요."
"네. 무슨 일이세요?"
문은 열고 싶지 않다.
"잠깐 문 좀 열어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
찰칵찰칵-
문고리를 비트는 소리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과장님. 문 좀 열어주세요.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
"과장님. 그냥. 손 만 잡고 있을게요."
젖은 머리칼이 쭈뼛 치솟는 게 느껴졌다.
조용히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하지만,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똑똑-
죽은듯이 가만히, 무릎을 감싸쥐었다.
...
잠시 후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가 멀어지고 더 이상 노크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이어폰의 음량을 최대로 하고 미드를 재생했지만, 귓가엔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김 과장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그냥 있었어?"
"아침 되자마자 주인아주머니한테 가서 얘기했지."
"그랬더니?"
"그게 다냐고 묻길래, 그게 다라고 하니 그럼 그냥 빨리 본관으로 짐 옮기자고 하시더라."
"그리고?"
"그리고. 나한테 짧은 바지 입고 있었었냐고 물으시더라. 나 참, 내가 짧은 바지가 어딨어 그 추운 독일에서."
"와우씨.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게 다야. 정말 심각한 일이 났던 것도 아니고. 또... 그분들은 장기투숙 자니까 그 숙박비가 얼마겠어.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몇 백만 원은 훌쩍 넘지... 난 이해해."
"뭘 이해해. 아휴 바보야."
"..."
김 과장은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레 다시 말을 이어간다.
"어떡할까? 이 업체, 그냥 하지말까?"
나에게 묻는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이유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선택지를 나에게 던진다는 건.
그는.
영업사원이다.
실적이 이름이 되는.
"아니, 내 이름 기억도 못할 거야. 나랑 상관없이 네가 받은 전화니까 네가 진행하면 되지."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에 기운이 빠져있다.
그래도.
이해한다.
그러기로 마음을 먹는다.
오랫동안 애써 떠올리지 않았던,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돌봐야 할 건 돌아보지 않았던.
그날의 나에게.
꿈에
그날 밤, 깊은 잠이 들었다.
꿈속의 나는 빛 하나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다.
가만히 다가가 옆에 앉아본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떨고 있는 손을 마주 잡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어느 전시장 앞으로 데려갔다.
전시장 입구엔 영어로 큼지막하니 주제가 쓰여 있다.
-성추행 또는 성폭행당한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차림-
그녀는 나의 손을 조용히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찬찬히 전시장을 둘러본다.
그곳엔 구멍이 송송난 트레이닝 복, 교복, 각종 먼지에 닳아버린 작업복 할 것 없이 모든 종류의 옷들이 벽에 걸려있다.
그리고.
한 벽면 앞에 걸음을 멈춘다.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는 그녀.
여러 종류의 기저귀들이 걸려있는 공간이다.
그녀는 곧 고개를 돌리더니 구석으로 달려가 구역질을 시작한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가 조용히 등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얘기했다.
"너 잘못이 아니야."
그가 보여줬던 사진 속 딸아이를 저주할 이유도, 수많은 다른 남자들을 욕할 이유도 없다.
그날엔 그저 그 개 한 마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