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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근을 떠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by 아는개산책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의 강물이 시퍼런 옷을 펄럭이며 나를 기다고 있다.


침을 꼴깍 삼키며 올라왔던 계단을 흘끗 돌아보지만,

결국 나는 마음을 먹고 떨어질 준비를 한다.


"고우리!, 지금이라도 당장 내려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는 유리가 나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친다.


"싫어. 난 뛰어내릴 거야."


한 발만 앞으로 떼면 돼.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마침내 나는 오른발을 난간 앞으로 내밀어 허공을 향해 그대로 몸을 싣는다.

빠르게 낙하한다.

동물의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스물일곱, 번지점프를 하다



준비


회의실 안의 긴 탁자 위에는 올해 새로 찍어낸 달력이 백여 개는 쌓여 있다.


"과장님. 이걸 언제 다해. 꼭 해야 해?"


강훈은 내가 건네주는 포스트잇을 하나씩 달력 위에 붙인 후 봉투에 넣는 아주 단순한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툴툴대기는.


맞은편의 나는 각 업체 담당자에게 그간의 감사했던 마음과 간단한 신년인사를 손으로 정성껏 눌러 적는다.


"어, 난 손 편지가 좋아. 그리고 예전에는 계산서도 일일이 다 프린트해서, 응? 하나씩 봉투에 다 풀 발라가지고 우편 보내고 했었어. 넌 지금 그렇게 안 하잖아. 좋은 세상에 일하는 줄 알아."


"뭐야, 과장님도 라떼야?"


"난 아.아.야. 빨리 가서 사 와"


"아, 뭐래."


높이 쌓여있던 달력들도 어느새 그 끝이 보여갈 때 즈음, 강훈이 다시 한번 정적을 깬다.


"과장님은 힘들지 않아?"


"왜"


(애들은 왜 자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에 남 힘든 얘기를 먼저 물어보지?)


"자기 얘기하는 거 한 번도 못 봐서. 과장님 얘기도 좀 해봐"


"힘들 때 있지. 너 같은 부하직원 들어올 때."


"됐고, 나 요즘 진짜 힘들어."


나는 메모지 안의 점점 휘갈겨지는 글씨체를 보며 한계를 자각한다.

다시 천천히, 또박또박.


"나 힘들다고"


"듣고 있어"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한다.


"아빠가 일하다 사고를 좀 내셨거든, 우리 아빠 무슨 얘기하는지 전에 내가 말했지?"


나는 고개를 들어 강훈을 한 번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적던 글자를 마저 끝낸다.


"사람이 좀 다친 일이라. 크게 번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런 쪽을 아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지켜보기도 힘드네."


"많이? 심각해?"


"응. 그런 것 같아."


"자, 이게 마지막 종이야. 달력에 붙여."

마지막 포스트잇을 그의 눈앞으로 쭉 내민다.


"내 말 들었어?"

"들었어, 이제 나가자."


마감된 봉투들을 집히는 대로 잡아들어 종이봉투 안에 포개어 넣는다.


"어딜?"

"이제 이거 다 돌리고 와야지."

"뭐? 오늘 다?"


무거운 종이가방을 그 앞으로 밀어주며 도돌이표 같은 질문을 그만 끊어낸다.


"가자"



그렇게 돼야 할 땐, 그렇게 되더라.


"추워 얼어 죽겠는데 꼭 오늘 가?"

"왜인지 알아?"

"왜"

"넌 대리니까. 난 과장이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도 강훈의 도전은 끊이지 않는다.

나도 질 생각이 없고-


"나 오늘 먼저 집에 보내주고, 과장님이 나랑 돌고 왔다고 뻥쳐주면 안 돼?"


"대신 오늘은 인천만 돌자. 그리고 혼자 돌 거면 네가 돌아야지 내가 집에 가고. 그러자!"


"출발할게요."


드디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짙은 회색의 푸조.


하지만 세 시간 뒤, 한 건물 안에서 강훈은 투덜투덜 볼맨 소리를 달고 걸어 내려오고 있다. 두꺼운 패딩 속에 커다란 덩치를 숨기니 성난 곰 한 마리가 따로 없다.


"아이, 지금 몇 번째야, 먼저 전화라도 하고 오지. 여기도 담당자 외근 나가고 자리 없대"


실수다. 각 업체 담당자에게 연락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누굴 탓해- 과장 탓이지.


인천 한 바퀴를 다 돈 것 같은데 막상 만나서 인사를 한 업체는 처음 찾아간 한 군데뿐이었다.


"몇 시지?"


"아, 세시 다 돼 가. 어떻게, 남은 곳 더 돌아?"

운전석에 앉아 다시 벨트를 채우며 그가 묻는다.


이렇게 돌아간단 말이지-

그러면 뭐.


"출발해"

"여기? 여기는 또 한 이십 분 걸릴 거 같은데."

주소가 빼곡히 적힌 리스트에서 한 군데를 손으로 짚는다.


"아니, 대천."

"거긴 또 어디야, 몇 번째에 있어?"


"아니, 대천. 바다로. 너 대천 해수욕장 몰라?"

"뭐? 진짜로?"


"싫으면 더 돌고, 거기 다음 업체로"

"아냐, 가자. 오, 웬일이야 고 과장님"


세상 근심 다 가지고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펴지더니 엉덩이까지 들썩 대는 듯하다.


"그런데 대천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는 알고 그러는 거지?"

"나 몰라. 나 서울사람 아니야"

"아 몰라 나도, 일단 가자. 고고"


시리도록 하얀 겨울

한가진 도로를 가로질러 우리는 바다로 향한다.

달려라, 나의 푸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조금은 늦은, 평일의 오후에 도착한 한산한 바다.

날은 서럽게 차기도 하지만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 바다는 여전히 엄마의 마음 같다.


나와 강훈은 신발을 한 손에 쥐고 맨발이 되어 서두름 없이 모래 위를 걷는다.


나는 사람이 말이 없는 그 순간들이 가장 편안하다.


대학시절에는 술만 먹었다 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우리가 뭐라고 세상 바닥을 다 아는 듯 옳고 그름을 논하다 보면 어느 즈음엔 세네 명의 생존자만이 꺼져가는 정신을 붙들고 길바닥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덜 취한 누군가가 던지는 한마디.


-대천 가자.


가끔 시동이 꺼지기도 해서 거의 공짜로 넘겨받았다는 선배의 낡은 중고차, 그 좁은 뒷좌석에 잔뜩 몸을 구겨 넣고 여기가 꿈이냐 현실이냐 하면서도 아무 노래나 고래고래 부르며 새벽길을 달리곤 했다.


바다에 가면, 우리가 찾는 무언가가 반드시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젊음을, 흐트러짐을, 눈물을 아무 말 없이 받아주는 그 시간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때문인지 나는 취업을 하고서도 근교의 바다라고는 대천 밖에 알지 못했다.


"대천 많이 와봤어, 과장님은?"


"그냥"


"나도 커서 오는 건 처음인데. 오랜만에 바다 보니까 좋긴 하네."


"여기 앉자"


하얀 모래 위에 신발을 툭 집어던지고 그 옆에 무릎을 세워 앉자, 강훈도 주춤하더니 이내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대 자연. 어머니의 품. 사람들의 기대와 한숨을 모두 끌어안은.

바다 앞에서는 헝클어진 모든 것도 잠시 내려앉는다.

약속이나 한 듯이 한동안 둘 다 아무 말도 없던 것처럼.


"그래, 고민이 다 뭐냐. 이렇게 멍 때리면서도 시간은 계속 가는데."

갑자기 세상 통달한 사람처럼 말하는 강훈이다.


"..."


"그냥. 과장님한텐 말하고 싶었어. 신경 안 써도 돼. 아버지 일도 그렇고. 나도, 뭐 어떻게 취직은 했는데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고. 회사 가면 팀장은 욕만 하고, 집에 오면 결혼은 언제 하냐부터 해서. 크크"


나에게 말하는 건지, 바다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다 지나가는 거겠지? 과장님은 이미 다 겪었을 거 아냐.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까"


강훈은 포인트를 안다.

내가 욱하는 포인트를.


"네 살이다 야."

무릎을 감싸 안으며 대답한다.


바다가 너무 좋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나는 언제나 이런 고민들을 안 하려나? 어? 과장님, 과장님이 좀 알려줘. 아, 과장이잖아!"


과장이라고, 세월 얼마 더 먹었다고 다 알 수 있는거면 나도 얼마나 좋을까.

나도 내게 도움을 구하는 후배에게 마음을 단디 할 조언을 선뜻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미안하다.


"바다 봐"


나는 가만히 한마디를 던지고 다시 너울거리는 바다 끝으로 시선을 옮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너를 바다로 옮겨 놓는 것.


나는...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마음이 달라지기도 하던데.


너는.

어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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