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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수지 (1)

나? 사장딸.

by 아는개산책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될 때면 그중의 한 옷을 골라내어 일주일 내내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센스도 없고, 딱히 욕심도 없었다.


중학생 시절 어느 날, 놀이터에서 한참을 노는 중에 친구가 뜸을 들이다 물었다.


"너는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어?"


말이 끝나자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키득거리며 나를 보고 웃었다.


"아직 깨끗해서. 왜?"


그때는 질문의 요지를 알지 못했고, 친구들의 웃음의 뜻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가끔씩 떠오르는 그날의 그 한마디는,

내게 옷차림으로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 넣었다.


참, 피곤하다.



오늘도 너야.


"그거 들었어요?"


회사라는 곳은 어떻게 매일매일 새로운 뉴스가 터지는 걸까.


나는 새로운 도토리를 물고 와 톡 뱉어내고 싶어 하는 그녀를 한번 흘끗 보기만 할 뿐 별 다른 반응은 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하겠지.


"사장님 딸이 온대요."

"사장님 딸? 누구?"


한창 메일을 쓰던 정 과장이 토끼눈을 하고 끼어든다.

서림은 본격 탄력을 받는다.


"중국에서 공부한다는 사장 딸, 이번에 졸업해 가지고 우리 회사로 온대요."


"말이 돼?"


너무나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도 한마디 보탠다. 그것을 본 서림의 눈이 순간 반짝한다.


사장은 나이가 많고 아들은 없다.


"회사 물려줄 건가 봐요. 그래서 이제 일 배우러 들어올지도 모른대요."


"어디로? 무슨 팀으로?"

정 과장은 궁금해 죽겠다.


"넌 그런 건 어디서 듣고 오는 거냐"


제대로 확인된 얘기인지나 모르겠다. 나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서림은 해줄 얘기가 많다. 곧이어 정보를 덧붙인다.


"그런데, 성격이 완전 망나니래요. 첫 딸에 오냐오냐 커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난리 난다고"


뒷담화로 번지면 더 재미가 없지.

나는 컴퓨터를 켜서 쌓인 이메일을 훑는다.


"아니, 다 됐고, 예뻐?"


정 과장의 질문에 하릴없이 사장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바로 머릿속 손짓으로 휙휙 저어 물리쳐본다.


정말로 무언가 일이 생기긴 하는 건지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팀장이 문에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서림, 팀장."

책상옆에 쭈그려 있던 서림에게 알려주니 냉큼 일어나 자리로 돌아간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게다.

오늘도 내 뒤를 그냥 스쳐가주오.-


하지만.


"고 과장, 일로 와봐"


당첨이다.

천천히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 다이어리를 든 채 팀장 자리로 다가간다.


"이번에 상해 출장 네가 가라."

"네? 그건 팀장님이 가신다고."


"그냥 네가 가."


대화는 끝이다.

네. 하고 뒤돌아 서는데 한마디가 더 꽂힌다.


"수지도 데려가, 저 그 사장 딸"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있다.


멈칫하고 다시 팀장을 뒤돌아 보지만, 내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다.


"네."


이제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데도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아니, 우리 팀은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주 상황 처리반 났구만.



첫인상


푸동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팀장은 말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까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도 굳이 묻진 않았다.

아쉬운 사람이 찾아오겠지.


이어폰을 낀 채 캐리어를 드르르륵 밀고 출구를 나간다.


-일단, 커피를 마셔야겠다.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톡 치는 게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고. 과장님?"


튀어 오른다. 소녀의 목소리가 알알이 흩어지는 진주처럼.


"어?"


"히히, 네 저 사장딸, 이수지예요. 반가워요~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무늬도 없이 얇은 검정 면티 아래 아디다스 트레이닝바지를 입고 멀뚱하니 서 있는 내가.

더 동생 같은데?

심지어 키도 더 작고.


하얀 트위드 쟈켓에 긴 다리가 돋보이는 짧은 가죽치마를 입고 있는 그녀, '나 사장딸!'은 그렇게 나를 놀라게 하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이쑤시개 세 개는 올라갈 것 같은 긴 속눈썹. 그냥도 예쁘지만 어려서 더욱 싱그러운 멋이 나는 이수지.


-공항 오는데 십센티 구두는 왜...


"언니, 커피마시려고? 내가 사줄께, 같이 가자."

활짝 웃으며 팔짱을 낀다.


"응? 그래"


오는 반말에 가는 반말. 정답다.


커피 하나씩을 물고 택시에 오르자 수지는 본격적으로 돗자리를 깐다.


"언니, 일하는 건 어때요? 재밌어? 난 중국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은 많이 변했겠네. 언니 남자친구는 있어요? 연애 많이 해봤지? "


쉴 틈이 없이 방방거린다.

우리. 구면이었니?


"어, 이 유리. 이 브랜드 알아요? 나 여기 유리회사 사장 아들하고 사귀었었잖아, 진짜 못생겼었는데 돈이 엄청 많아. 얼굴은 안 중요하더라고요. 히히히, 나한테 엄청 잘해줬었는데. 계속 만났어야 했어."


택시 유리창에 박힌 브랜드를 손으로 짚으며 떠든다.


"아, 그런데 우리 아빠한텐 비밀이에요. 나 여기서 연애 한 거 들으면 아빠 기절해"


"사장님?"


"응, 언니한텐 사장이구나. 아빠, 회사에서도 드럽게 말 안통하죠?"


이정도는 답할 수 있지.


"너랑 비슷하겠지"


"나? 하하하, 에이, 난 아빠랑 완전 달라. 언니는 아빠 얘긴 하기 싫겠다, 내가 유리사장 아들이랑 헤어지고 또 누구 만난 지 알아요? 언니 이름 들으면 완전 놀랄 거야"


-난 한국 연예인 이름도 잘 몰라...


그렇게 호텔에 도착하는 한 시간 가량 동안 그녀는 지난 연애사를 모두 읊어댔다.

손가락으로 다 세지도 못할 정도의.


그냥 귀여운 얼굴이 아니라, 예쁘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이제 막 움터서 파란 하늘을 마주한 새파란 새싹이 이제 여기가 내세상이지 하는 에너지를 뿜어댄다.


그녀의 주저하지 않는 밝음이 새삼 부럽고 신기하다.


-그래도, 너도 외로웠던 거지?


생각이 먼저 떠올랐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었다.



(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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