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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수지 (2)

나? 사장딸.

by 아는개산책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현장일


호텔 방 안, 한 침대에 걸터앉아 수지가 화장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전시장에 가면 사람들을 만나니까 굳이 화장을 새로 해야 한다는 그녀.

두꺼운 화장을 지워내고 나니 아직 울긋 불긋 여드름이 남아있는 게 영락없이 어른이고 싶은 아이의 느낌이다.


'고 과장, 이게 정말 최선입니까?'


언젠간 그녀가 사무실 책상에서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내게 저리 말할 날이 오는 건가? 진정?


"으, 춥네."

두 손으로 팔을 감싼다.


"응? 5성이라 에어컨은 빵빵하다아., 언니는 화장 안 해?"


"어"


"왜?"


나는 대꾸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짙어지고 있는 눈화장을 자세히 살펴본다.


"나 이렇게 속눈썹 한가닥씩 붙이는 사람 처음 봐."

"여기선 이렇게 해야 돼"


난 중국에선 못살겠네-

손목의 시계를 흘끗 보고 얇은 여름 작업복을 집어든다.


"나 먼저 간다."


"아이, 언니 같이 가! 조금만 더 하면 돼."


정말 없던 여동생 하나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철 안 드는 늦둥이.


푹푹 찌는 무더운 공기는 전시장 안에 갇힌 습도와 함께 더욱 치솟아 오른다.


아직 부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전시장 안에서 산소 한번, 먼지 한번 들이마시다가 코를 풀면 새까만 코를 보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화장실에서 땀을 대강 닦아내고 밖으로 나오니 수지가 아직 주인 없는 부스 안에서 다리를 까닥까닥하다가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묘하게 예쁜 백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수지에게 다가가려니 다른 때와는 다른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 파트너 조이를 비롯해서 인부들 몇까지, 분명해야 할 일들이 남았을 텐데 일은 않고 그녀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서있다.


"얘들 다 뭐야?"


"몰라 언니? 늘 있는 일이야. 그냥 그러려니 해. 히히"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픽 웃으며 옆으로 가서 의자 하나를 꺼내 앉는다.

그리고 오늘 마저 해야 할 업체리스트를 꺼내어 다시 확인하기 시작한다.


"언니, 이거 끝나고 짝퉁시장 가자"


"뭔데?"


"언니 명품 몰라? 그거 짝퉁. 여기서 엄청 잘 만들어"


명품도 잘 모르지만, 전시장 게이트 사이로 비치는 하늘빛이 심상치가 않은 게 더 마음이 쓰인다.


"비 오면 안 되는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비? 오늘 비 온대? 언니, 커피부터 마실래?"


턱을 괴고 가만히 문 밖만 쳐다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톡 톡 검은 동그라미들이 하나씩 바닥에 찍히기 시작한다.

문 앞에는 아직 다 들어오지 못한, 내일부터 전시하게 될 커다란 기계 장비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아, 저것들 젖으면 안 되는데"


하는 순간 후드득- 조금 더 속도가 빨라진다. 바닥이 젖는 속도가.

다급히 두리번거리며 중국 파트너 조이를 불렀다.


"조이! 저거 덮자, 덮개 준비해 줘 얼른"


고개를 끄덕인 조이는 바로 인부들 몇을 데리고 지시를 내린다.


제발-

할수록 인간의 사정은 우습다.


먹구름까지 짙게 드리우는 걸 보니 이제 몇 분 안 남았다고 예고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마음 급한 우리들과는 달리 인부들의 몸림은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그 사이를 까칠한 목청 하나가 뚫고 전시장 안을 울리기 시작한다.


"늬들 당장 안 튀어가고 뭐 해? 지금 빨리 가서 커버 씌우고 작은 박스들은 가지고 들어와! 오늘 보너스다! 빨리 뛰어!"


라고 중국어로 말한 것을 그녀는 내게 나중에 풀이해 주었다.

중간중간 욕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녀의 카랑카랑 덕분에 인부들의 움직임이 조금은 빨라진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도.


작업복에 달린 모자를 꺼내어 쓰고 밖으로 나가 들 수 있을 만한 상자들을 골라 안 쪽으로 옮겨본다.


"언니! 언니는 들어와! 얘네가 다 할 거야."


하지만, 빗방울이 굵어지는 게 눈에 띄게 빨라지자 수지도 아이씨를 연발하며 밖으로 뛰어나온다.


"이것들 집어넣으면 돼?"


"야, 넌 하지 마. 네일 까져"


"이미 까졌어. 언니가 한번 해주겠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그녀는 내 앞에 서서 상자를 드는 데 힘을 보탠다.


길고 예쁘게 다듬어진 검지 손톱에서 보석하나가 떨어져 나가려는 게 얼핏 보인다. 나무박스를 들어서 옮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우리 공주님.


아이고, 빗물에 곱게 올린 그녀의 속눈썹이 기울어지는 것도 같다.


이럴 때 입으라고 작업복 있는 건데.

벗어주면, 싫어하겠지?



짝퉁시장


어디선가 듣기는 했지만, 가본 적도 관심도 없던 장소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첫 경험은 이래서 잘해야 한다.


다닥다닥 틈 하나 없이 이어져있는 가게들 사이로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의 물건들이 디자인도 예쁘기만 하다.


나는 그곳의 분위기와 물건들에 말 그대로 반해버렸다.

벌써 두 시간 째니까.


"언니, 나 고생했으니까 짝퉁시장 같이 가줘. 나 거기서 친구들 선물 살 거란 말이야."


1절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샤워만 대충 마치고 나온 짝퉁시장.


호텔에서는 10분도 걸리지 않는 공원 안쪽, 원형경기장 같은 곳에서 조금 더 지하로 들어간다.

혼자서는 다시 찾아오긴 힘들 것 같은 장소에 그것이 있다.


가뜩이나 예쁘니 어쩌니 해서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데 수지는 이 집에서 이 물건, 저 집에서 이 물건, 계속 살듯 말 듯 간만 보고 몇십 분째 빈 손 쇼핑 중이다.


"언니, 이거 어때?"

"괜찮아"

"언니, 이건 어때?"

"이뻐"


막둥아 막둥아 오마이 막둥아 이제 고만 가자.


"아이, 언니가 다 괜찮다고 하니까 오히려 못 사겠잖아."


그래, 나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엔 꼭 여기서 살게. 해서 마지막 발걸음을 한 문제의 가게.


바비인형을 변형한 귀걸이 거치대를 벌써 15개째 또 또 새로운 것을 가져오라고 하는 중이다. 가게 안의 분위기도 더 이상 처음처럼 우호적인 느낌이 아닌지 꽤 되었다.


"수지야. 이번엔, 살 거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묻는.


"아니, 언니 이것 좀 봐. 여기 또 까져있네. 이런 걸 어떻게 사? 나 10개는 사야 되는데. 이중에 멀쩡한 거 5개밖에 없어."


"야, 이거 얼마 하지도 않는데 일단 그냥 사."


"언니, 제품이 별로여도 다 사고 그러면 가게 주인도 발전을 못해."


나는 양손으로 내 이빨만 두들기고 서 있다.


"하, 여긴 안 되겠어. 다른 데 가보자"


"그건 아닌 거 같아."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수지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이미 살벌한 저 표정 저 얼굴 저 분위기의 주인아저씨 아줌마.


"그럼 일단 5개만 살까?"


갑자기 중국어로 크게 얘기하는 수지.

그러면서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언니, 달리기 몇 초야?'


'나? 24초'

생각도 없이 바로 답한다.


'사람이야? 거북이야?'


쩝.


'언니,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야. 나 따라 뛰어'


'왜?'


'하나, 둘 ,,"셋!"


수지가 갑자기 가게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고 번뜩 정신이 든 나도 그 뒤를 쫓아 달렸다. 인형이고 뭐고 그 자리에 내팽개친 채로.


중국어로 된 욕설과 함께 저년 잡아라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알아듣진 못해도 맥락상 확실하다.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리고 공원입구가 보일 때까지 계속 달린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나한테 정말 왜 이래.

이 망나니야.



우리 회사


출장을 마치고 출근하는 걸음에 강아지 하나가 따라붙었다.

서림이라는 강아지.


"왜 또"


"과장님, 잘 다녀왔어요?"


피식 웃으며 실내화로 갈아 신는다.


"별일 없었어? 사장딸 어땠어? 과장님 힘들게 안 했어? 어디 다녀왔어?"


"이름, 수지야"


"아씨, 왜 다정하게 이름 불러. 아직 회사 들어온 것도 아닌데"


"서림, 팀장"

조그맣게 얘기해도 서림은 벌떡 일어나 자리로 달려간다.


그 모습이 귀여워 살짝 웃음이 난다.


모니터를 켜며 잊을 수 없는 그 난동의 밤이 다시 한번 떠올린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호텔까지 걸어 들어가면서 미친 듯이 웃었던 그 시간.


왜 그렇게 웃음이 나온 거지?


"우리 회사 온다며?"


"아니? 언니 일하는 거 보니까 못 가겠던데? 나 그런 막노동 못해. 체질에 안 맞아. 언니는 작업복도 잘어울리더라. 일하는 여자 멋있다고 생각한 거 처음이야."


"크 뭐래."


"여기서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이나 하고 싶어."


그녀의 말을 듣고 말해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뗀다.


우린 정말 달라.

하지만.


"난 네가 좋은데"


"응? 뭐래. 난 남자만 좋아해... 음. 그래도 언니는 특별히 나도 좋아해 줄게"

그러고서는 또다시 까르르.


밤이 되니 더 이상 무겁고 습한 공기도 없다. 여기저기서 불빛들이 반짝이는 게 마치 아직도 청춘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언니 같은 사람이 아빠 회사 오래 다녔으면 좋겠다"


조금은 진정한 수지가 팔자걸음으로 투박하게 걸으며 건성으로진다.

그래서 나도 건성으로 툭 답다.


"오래 다닐 거야 나도. 우리 회사"


그냥.

그날은 웃음이 나왔다.


행동에 이유가 없어도 되는 날이 있다.

이유 없이 사람이 좋아지기도 하는 것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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