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지 않고 주기만 하는 마음. 알아?
나는 줄 때가 더 행복하거든.
건방지네.
세상에 바라지 않고 줄 수 있는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밖에 없어.
그냥 해주는게 뭐가 어렵다고.
살아봐.
그럴 수 있나.
너가 왜 자식이라고 불리는지
살면서 알게 되겠지.
독일 출장
면세점 안의 새로 나온 물건들과 각종 할인 행사들이 지갑을 열어보라고 사정없이 손짓한다.
나는 주머니 속의 종이를 꺼내 다시 한번 읽어본다.
"엄마는 냄비, 아빠, 언니, 막둥이..."
장기면 장기라 볼 수도 있는 일정이다 보니 출장비가 꽤 두둑하다. 이번에는 식구들에게 모두 가지고 싶은 물건 하나씩을 주문받았다.
혼자만 여행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늘 미안하기도 하고.
-지금 사면 들고 다니기 힘드니까...
"야, 뭐 해. 들어가자. 그건 또 뭐냐?"
어느새 다가온 팀장이 건조한 어조로 묻는다.
"선물이요. 이번엔 선물 좀 사가야 해요."
"어, 그런 거 중앙역 옆에 살 데 많아. 거기서 사"
"같이 가주세요"
대답도 없이 승강장 안으로 발걸음을 하는 팀장을 보며 나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좁은 복도를 지나 가운데 좌석들 한가운데쯤에 멈춰 선다.
"팀장님, 여기 들어가세요"
나는 중앙 통로 좌석의 가운데를 가리킨다.
"아니 왜 넌 복도고 내가 안쪽자리냐? 그리고 왜 니 옆이야?"
좌석번호 앞에 선 팀장은 가방을 벗어 의자에 놓으며 또 한 번 툴툴댄다.
"알아서 하라면서요"
"어휴"
팀장은 한숨을 탁 내뱉으며 자리에 털썩 앉아 눈을 감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메고 온 작은 가방에서 PDA를 꺼내 들어 다운로드한 영화가 잘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팀장님, 팀장님"
"아 깨우지 마. 도착할 때까지"
잠깐 멈칫하고 흠- 생각하는 척하다가 다시 한번 팔걸이에 올려진 팀장 팔을 살짝 흔든다.
"아, 왜에"
나는 왼손으로 PDA를 들어 팔걸이에 걸치고는 다운로드한 영화의 목록을 가리킨다.
"재밌겠죠?"
"아 됐어 너나 실컷 보세요"
이어폰 하나를 팀장 손에 얹어주고 영화를 플레이한다.
눈이 왔으니 귀도 오겠지.
따로 영화 정보를 찾아본 것은 아니었지만 제목을 보니 뭔가 새로운 영감을 줄 것만 같아 기대가 크다. 팀장이랑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리고 역시나.
첫 장면부터 흘러나오는 대사도 연출 효과도 뛰어나다! 명작의 느낌이 폴폴.
-오, 이거야.
흘끔 팀장 쪽을 쳐다보니 팀장도 이어폰을 끼고 눈은 이 작은 화면을 향하고 있다.
-볼 거면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 있는 것처럼 예술이 주는 감성도 인간의 짐작을 초월하는 것들이 많다.
잘 만들어진 영화, 책, 그림을 보고 난 후 느껴지는 전율.
나는 메마른 초원 위의 갈대 같은 팀장도 한 번은 그런 휴식 같은 시간을 가져보길 바랐다.
나는 플레이만 눌러주면 되는 거고-
그렇게 열세 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무사히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그 시간 속에 세 번이나 처음으로 다시 돌려보게 되었던.
'나비효과'라는 제목의 영화와 함께.
무슨 사이긴
'도저히 못 걷겠어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팀장인데, 까라면 까야지.
몇 번이고 길을 헤매면서 여기가 아닌가 보다. 하는 팀장의 옆에서 더 이상 할 말도 없어 땅만 보며 걷고 있다.
오전 전시장 작업이 막 끝났을 때,
"오늘 일 끝났으니까, 시내 나갔다와. 뭐 산다며. 난 고흐 생가나 한번 더 봐야겠다"
라고 먼저 말해준 팀장이다.
"고흐 생가요? 저도 가고 싶은데. 그럼 거기 갔다가 같이 쇼핑 가면 안돼요?"
"아 너는 귀찮게 뭘 자꾸 그러냐"
항상 말은 그렇게 하면서 같이 하자고 하면.
좋아한다.
말도 안 되게 공격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늘 외로운 것 같은 사람.
자리 탓일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세상 탓일까.
그래도 두 시간은 너무 했다.
고흐 생가를 본 것까진 좋았는데. 딱 거기까지.
울퉁불퉁한 돌길 위를 두 시간이나 뺑뺑이 돌면서 한번 본 주방용품 할인점을 찾겠다고 데리고 다니는 건.
팀장이고 뭐고, 자를 테면 자르고, 난 못하겠다고 주저앉아야겠다.
"어, 저기 있나 보다. 고과장 뭐 해? 빨리 와"
백 미터도 더 앞으로 국자 그림이 그려진 간판이 보이는 것도 같고.
나는 한쪽다리를 질질 끌며 내 허리굵기만 한 나무를 받치고 있는 돌담 위에 털썩 앉았다.
"팀장님. 저 허리 나간 거 같아요."
"아 어쩌라고?"
"휘슬러 냄비 하나만 사면 되는데. 팀장님이 사다주시면 안 돼요?"
애처롭게, 구슬프게 말해본다.
"아씨, 내가 왜? 그냥 숙소 가"
"팀장님! 한 번만요. 이제 또 나올 시간 없잖아요."
아우씨.
들린다.
그래도
그 정도는 좀 해주세요.
우리 같이 영화도 본 사이잖아요.
이 자식.
커다란 트렁크 하나에 작은 냄비박스까지. 어떻게 이고 지고 집 앞까지는 왔다.
"헤헤"
짚 앞에 서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다.
오랜만에 김치와 밑반찬을 주겠다고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 아빠가 집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그냥 6평짜리 텅 빈 방이 아닌 것이다.
띵동-
괜스레 벨도 눌러본다.
반가운 엄마가 두 팔을 벌리고 더 반가워해준다.
"아이고 이놈 자식 고생했다"
아빠가 얘기하며 트렁크를 받아 끙차 바닥에 눕힌다.
"힘들었어?"
"아니, 재밌었어, 내가 선물도 다 사 왔어"
신이 난 나는 트렁크를 타탁 하고 열어 무거운 한쪽을 들어 올린다. 그런데 못 보던 옷 두 벌이 벽 한편에 걸려 있는게 눈에 들어온다.
"어? 저게 뭐야아?"
반찬도 고마운데 옷까지 사 온 거야?
돈도 없으면서-
하지만 두 눈은 반짝거린다.
"어? 아니 오늘 아빠랑 백화점 갔는데 세일을 많이 하더라, 그래서 언니 거랑 네 동생 이번에 회사 들어갔잖아. 그래서 두벌 사 왔지. 그래도 얼마 안 하대?"
"아, 내 거 아니고?"
아차 싶다.
안 물어도 되는데 그런 건.
"꼬 너는 돈 잘 벌잖아, 이렇게 좋은데도 많이 다니고 좋은 거 많이 살수 있잖아"
"여기 내 것 산건 하나도 없는데... 응 잘했네"
트렁크를 보며 말하다가 다시 씩 웃는다.
"나 먼저 좀 씻어야겠다, 화장실"
나는 코 앞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동시에 수도꼭지를 틀어 세차게 나오는 물이 세면대를 치고 흘러내려가는 것을 바라본다.
"아 뭐야"
눈물이 나나.
왜에.
콧물도 나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눈물 콧물의 못난이가 하나 들어있다.
물을 묻혀 찰싹찰싹 뺨을 친다.
왜 우냐
뭐가 슬프다고.
끅-
그냥 삼켜.
샤워를 마친다.
"왜 이리 오래 걸렸어?"
엄마는 돌아보지 않고 말하며 내 짐을 하나씩 꺼내 정리 중이다. 정리가 제일 귀찮은 거잖아.
"아니, 엄마 하지 마, 무릎도 안 좋은데."
나는 엄마 옆에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손을 잡아 물리며 남은 짐들을 꺼낸다.
"엄마가 매일 밥도 못해주고. 이런 거라도 해줘야지"
"무슨 엄마가 밥 해주는 사람이야? 됐어. 나가서 사 먹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돈 아껴야지. 엄마가 김치찌개 끓여놨어"
"아냐 사 먹자, 아빠도 고기 먹고 싶지?"
침대에 앉아 나와 엄마를 물끄러미 보기만 하던 아빠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며 말한다.
"아이고, 그럼 우리 고생한 딸 코 묻은 돈 맛 좀 보러 갈까?"
"응 나가자 나가"
나는 서둘러 지갑을 들고 앞장을 선다.
현관에 걸려있는 거울을 지나치는 내 눈이 약간 붉은 것 같기도 하고.
나 진짜 괜찮은데.
다음날 회사에 간 사이 엄마아빠는 집으로 내려간다 했다.
그리고 퇴근해 돌아왔을 때.
침대 위에는 못 보던 새 옷 한 벌이 정갈히 놓여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가방이 툭 떨어진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말했지?
이 자식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