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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따윈 필요 없어 (1)

x의 헌신(2)

by 아는개산책

"과장님은 숨어서 일하고 대놓고 노는 것 같아요"


직원 결혼식 뒤풀이, 어느 카페에서 신입이 내게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일은 어차피 숫자로 보이는 건데 뭐."


"연애는요? C.C 해본 적 없으세요?"


사랑이야기엔 언제나 귀가 솔깃하다.

각자 무리 지어 떠들던 다른 여직원들의 시선까지 발칙한 신입의 질문 안으로 들어온다.


"누구랑 하냐. 우리 회사 얼굴 보고 뽑잖아. 잘 생기면 못 들어와"


"그렇긴 하죠"

키득키득


돈 벌러 왔으니까 일이나 해야지.


사랑 따윈, 필요 없어.

회사에서는.



영업하러 오세요


조금 더 집중해서 실적계산을 맞춰야 하는데 눈치 없이 전화가 울린다.


사무실로 오는 대표 전화는 누가 받아야 할까?

두 번만 울려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팀장이 없으니 모두가 자기 일에만 집중한 채 전화를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네, HHH, 고우리입니다."


"안녕하세요, 고 과장님 저 김시준입니다."


김 차장?

빗방울 떨어지던 편의점 지붕 아래에서 신발을 톡톡 털고는 나를 쳐다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힉-, 또 왜?


"네, 안녕하세요."


"영업하러 한 번 안 오시나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도 낮고 건조한, 한겨울의 찬바람을 닮았다.


"네?"


"연간 전시회 선정 되셨다고 이제 나 몰라라 하냐는 말씀입니다."


나 몰라가 아니고... 뭘 하면 되는데.

나 몰라가 맞았나...


"터키 가는 거 한번 만나서 사전 회의 하셔야죠"


"아, 네 터키."


"오후 네시에 태풍역에서 뵙겠습니다. 예약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네?"


뚝-


오늘도 조용히 끝날 것 같지가 않다.

혼자 죽을 순 없지.


"부장님! 오늘 ㅈㅈ협회에서 네시에 만나자고 합니다."

"들었어."

"아, 네."


네시부터 만나서 뭘 하려고.

가뜩이나 문과라 숫자가 힘든데 다시 처음부터 계산을 맞춰봐야 한다.


'김시준. 검정 안경.. 넌 이과지?'


단축키를 이것저것 눌러 엑셀 속 수식을 정리한다.

그러다가 의자를 뒤로 당겨 지금 입고 있는 옷차림을 한번 쓱 훑어본다.

회사로고가 박힌 검은색 단체티에 검정 카고바지.


하루 전에는 말해주던가.

짜증 나.


이번에도 엑셀 속 SUM(합계) 이 맞질 않는다.



영화관으로


4시 5분 전.

나와 김 부장은 한 건물 앞에 나란히 서 있다.

한 영화관 건물 앞에.


"부장님, 정말 영화. 보는 거예요?"


"김 차장이 사람 만날 때 꼭 술 먹어야 되냐고 오늘은 영화 보자고 했대. 특이해 그분도."


"특이한 정도가 아닌데요..."


한 협회의 상무와 차장.

한 업체의 부장과 과장.

오늘은 금요일.


불금에 상무부장차장과장 모여서 영화를 본다. 라...


네시가 넘어도 나타나지 않는 그분들을 기다리는 틈에 집에서 보기로 했던 친구 수연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늘 급 회식이야. 미안. 최대한 빨리 갈게+

SEND


"어이구 안녕하세요, 허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뒤에서 상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동적으로 뒤를 돌며 허리를 숙인다.


"아닙니다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상무님"


그 뒤에 보이는 감색 정장바지 위의 회색 니트. 목 위로 살짝 나온 파란 셔츠 깃이 단정한, 김 차장의 안경테가 보인다.


저런 사람이 매고 있는 검은색 백팩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의외로 텅 비어있는, 무늬만 가방일지도-


"영화는 저희가 예매해 놨습니다. 30분 시작입니다"


김 차장이 한 손으로 검은색 안경테를 살짝 올리며 말한다.


-정말 보는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회식을 한다던데요. 문화회식이래나? 맞아요?"


나나 부장이나 무슨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솔직하게 말하기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서로 눈짓으로 답을 미루다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들어가시죠. 팝콘도 저희가 사겠습니다"


보기 드문 조합의 네 남녀가 아직은 환한 영화관 안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자리도 어쩜.

네 명이 1열 횡대다.


막상 내부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의 불빛만이 객석을 비추자 나는 갑자기 파고드는 설렘과 긴장감에 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잠시 숨을 참았다가 옆자리의 김 차장을 쳐다본다.


"저, 팝콘 하나만 먹어봐도 돼요?"

"안 드신다면서요."


그래, 안 좋아한다!


"과장님 다 드세요"


김 차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팝콘을 통째로 내 손에 안겨준다.


-아니, 이럴 거까진.


혹시나, 팝콘을 먹으려고 두 사람이 한 번에 손을 집어넣다가 살짝 닿아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생각을 잠시라도 했던 나만 이상한 여자다.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입으로 넣다 보니 멈출 수 없던 팝콘 봉지는 곧 바닥이 드러났고, 아무도 화장실을 가거나, 말 한마디 꺼내지 않은 채 그렇게 정말 영화에만 집중한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이게 정말. 접대라고? 문화회식? 이게 모야?...


엔딩롤이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는데 전체 조명이 확 켜진다.

두 시간 어두웠다가 다시 밝아지는 것뿐인데도 왠지 모르게 민망한 기분이 든다.


마치 해선 안 되는 장난을 하다 들켜버린 것처럼.



(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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