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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따윈 필요 없어 (2)

x의 헌신(2)

by 아는개산책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밥 정도는 괜찮잖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상무의 식사 제안을 마다하고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보았다.


-분명, 사장 아들이야. 못해도. 친척이야.


"아, 그럼 고과장도 들어가, 나는 상무님이랑.어?"

부장이 반가운 말을 전한다.


-어디, 좋은 데 가시려고요?


"네, 그럼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막 영글어지는 가을밤, 환한 불빛으로 무장한 광장으로 함께 나왔다.


드높은 건물들 사이로 차가 다니지 않는 넓은 길,

가을바람이 부딪히는 일 없이 곧장 우리에게 달려든다.


"우어, 춥다"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요놈의 주둥이.

다시 주워 담으려는데,


"아, 저 가방에 바람막이..."


-주지 마세요.

이상하게 얽히는 건 싫니까.


확 두 팔로 몸을 감싸며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다.


"저 입으려고 하는데요. 제가 입어도 괜찮죠?"


근처까지 다가오던 비둘기 한 마리가 휙, 날아오른다.


"차장님은, 차장님 옷을 왜 제 허락을 구하고 그러세요."


볼멘소리로 대꾸한다.


"그냥요."


김차장은 잠시 멈춰 서서 검은 백팩 안의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어 둘러 입는다. 크지 않은 덩치에 딱 맞게 떨어지는 게 여자가 입어도 충분히 맞겠는데?


그의 걸음에 맞추어 다시 기 시작한다.

서로 어디로 향하는지 묻지도 않은 채.


"과장님은 영화 좋아하세요?"

"네"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

"근엔 본 게 없는데."


본의 아니게 대화를 끊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김차장은 따뜻하겠지.


지이잉-


+괜찮아! 오늘 남친 여기로 놀러 온대, 걔랑 밥 먹고 있을게! 너 오면 이따 한잔해 +


먼저 밥 먹는다고?

나도 지금 바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갈까? 아니면.?


"러브레터 아세요?"

"네?"

"러브레터 좋아해요. 이와이 슌지."

"아. 러브레터."


조금씩 발걸음이 느려진다. 같은 대화를 했었던 대학1학년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했던 친구의 장난도.


"괜찮아요? 추운 건?"


지금이다.


"저... 팔짱 껴도 돼요?"


나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여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네? 여기서요? 어... 네."


"넵!"


나는 몇 발짝 앞으로 가 양팔을 들어 혼자 팔짱을 꼈다.


"와 팔짱 끼니까 좋네요. 더 따뜻하고."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부른다.


"고과장님"


나는 팔짱을 풀고 다시 김차장에게 묻는다.


"차장님, 저 팔짱 껴도 돼요?"


고과장.

신났다.


"순댓국 드시러 가시죠"


응?


"과장님이랑 있으니까 순댓국 생각이 나네요. 잘하는 데 있는데. 가실래요? 원조라고 하던데."


술 생각이 아니고, 순댓국?

그나저나 영업은 김차장이 더 잘하는 것 같다.


"직급 높은 사람이 쏘는 거죠?"


그는 대답도 없이 그대로 앞장다.

그 사이,

피식. 하는 거.

나 봤어.


"추운데 혼자 팔짱 끼고 빨리 따라오시죠."


우리는 불금에 원조 순댓국 집으로 간다.



밥이 술을 부르고 술이 일을 만들고


이래서 원조. 원조들 한다.


들깨가루와 깍두기 속 고춧가루라는 허들이 버티고 있지만 입 안쪽으로 잘 밀어 넣으며 시작했다. 하지만 순댓국에 편육이 빠질 수 없고 편육에 소주가 빠질 수 없다 보니...


따뜻한 몸이 먼저 녹아들고 의외의 입담에 마음도 녹아, 소싯적 학창 시절부터 해서 먼저 얘기하겠다고 서로의 입을 수저로 막아내는 지경이다.


그렇게 나는 그가 미국 유학에서 처음 만나 최근에 끝나버린 10년 장거리 연애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들었고, 나 역시 질세라 고등학교 때 처음 본 첫사랑의 인상부터 해서... 눈물이 났었던 것도 같고. 그가 내 어깨를 토닥여줬던 것도 같고...

눈앞에서 그가 아른 아른...


퍼뜩-

눈을 뜬다.


익숙한 하얀 커튼이 눈에 들어온다.


"으악!"


"깼어?"


수연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 올리며 방으로 들어온다.


"나 왜 집이야? 어떻게 왔어?"


"뭐야? 기억 안 나? 그래도 정신은 있는 것 같았는데."


"욱"

일단은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먼저 비워야 한다.


"아이고, 작작 먹지. 어제 회사 그만둔 거야?"


"뭔 소리야?"


바닥에 털썩 앉아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수연이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쳐다본다.


"어제 차장? 뭐 그런 사람이 너 업고 왔잖아. 그래서 난 네가 회사 그만둔 줄 알았지"


이불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려던 나는 이불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속이 울렁거려 말을 하기가 힘들다.

그래, 울렁거려서 일거야.


당황한 나를 보며 아직 더 남았다는 듯이 수연은 뒤로 돌아 세를 잡는다.


"거기다 너 맨발이었어. 그 사람이 너 신발도 손에 들고 오던데. 양말은 그 안에 들어있고."


"거짓말."


"그 와중에 넌 집에 왔다고 네 침대 옆에 홍삼까지 먹으라고 챙겨주더라. 집에서도 영업하냐"


도리도리 있는 힘껏 현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그녀의 마무리 샷.


"그냥 가겠다고 하는 거 네가 굳이 굳이 붙잡으면서 다 먹는 거 봐야 보내준다고."


"으아아악"


"사표 써, 걍"


무인도,가면 있어?



월요일에도 두드리는


사는데 월요일이 꼭 필요한가.

왜 자꾸 찾지도 않는데 오는 거야.


애꿎은 머릿속만 벅벅 긁어대며 책상 앞에 앉아는 있다.


"하이"


김차장이 하이톤으로 인사하며 들어온다.


"이리 와봐"


나는 그가 자리에 가방을 놓자마자 팔을 잡아끌고 옥상으로 향한다.


"또 뭔데에"


막상 재떨이 옆에 세워놓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짓고 있다.

정도로 꺼지겠니.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워가는 그를 한번 보고는 금요일에 있었던, 친구에게 전해 들은 그 사건을 고해성사하듯 토해냈다.


영화관에서 한 번 놀라고, 둘만 나온 데서 두 번 놀라고, 순댓국에서 끄덕하더니 술집 이야기에 경악한다.


투명한 놈.

그리고 바로 난간을 가리킨다.


"여기서 뛰는 거야? 그동안 즐거웠어."


"너. 절대 비밀 지켜. 부장 알면 나 죽어."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해, 이제 우리 팀 망했다고 소문 낼 일 있냐. 흐흥"


"하..."


딱 한숨이 멎어갈 때.

울리는.

반갑지 않은.

그 소리.


지이잉-


느낌이 싸하다.


-뭐야, 어제 전화번호도 등록해 놨어?


'안경_ㅈㅈ협회'라고 쓰인 발신자가 화면 속에서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다.


"으악, 야 네가 받아"


나는 휴대폰을 빠르게 김차장에게 내민다.


"받아서 뭐라 해? 사귀자해?"


"미쳤냐?"


"내가?

그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으며 담배 하나를 다시 입에 문다.


확 분질러 버릴까.


"그만뒀다고 해"


"뭐?"


"아 연락 안 된다고. 그만둔 거 같다고 해"


"야. 빨리 받아. 그러다 끊기겠다."


두근.

두근.

두근.

아, 몰라.


통화버튼을 누른다.


"여 보 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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