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연탄 그리고 사람
아직 해가 뜨지 못한 새벽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빛들이 있다.
인간이 만든, 인간을 실어 나르는 차량의 불빛.
어제 내린 눈이 채 녹지도 못하고 드문 드문 하얀 무늬를 남긴 고속도로.
이른 아침부터 크고 작은 차들이 한산한 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한다.
쌩쌩 바람소리보다 더 먼저 지나치는 저 차들은.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잘은 모르지만. 모두.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달리는 거겠지?
새벽
"저거, 저거 또 명품 입고 왔어어! 얼어 죽겠는데."
스타렉스 문을 열고 올라타는 유수를 보며 태수가 꽥 소리를 지른다.
얇아 보이는 점퍼 위에 유명 브랜드 로고가 작지만 큰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쟤만 월급 더 받는 거 아니에요? 응? 과장님?"
나는 아직 술이 덜 깼다. 말 시키지 마라.
다행히 김 과장이 대꾸한다.
"왜에, 너도 좋은 옷 많잖아."
"나는 다 할인매장 가서 떨이 사는 거고. 쟤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잖아요."
"옷이 뭐가 대수냐. 입는 사람이 중요하지."
"어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가난하고 불쌍한데 무슨 봉사를 한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산지 알아요?"
"고생하면 다 불쌍해?"
"이게 다 고 과장님 때문이야. 으휴"
그래 다 내 탓이다.
올 한 해가 열리던, 그 시작의 겨울.
팀에서 할 수 있는 조금은 의미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얘기가 나온 회의자리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꺼내든 나의 한마디.
"우리도 연탄 봉사 한 번. 어때요?"
휴대폰으로 슬쩍 훑어본 연예 뉴스에서 션, 정혜영 부부 기사라도 봤던 건가.
왜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왔는지,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바쁜 사람들.
당연히 그대로 묻힐 줄 알았던 그 제안은 의외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현실이 되었고,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겨울의 끝자락을 함께 달리고 있다.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연탄 나르는 거야. 당신들 맨날 하던 거잖아. 힘쓰는 거"
운전석에서 실장이 백미러를 통해 웃으며 말한다.
그러자 태수가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푹 쉰다.
"맞아, 우린 막노동하는 사람들이지. 하- 이 짓도 언제까지 한다고. 나이 마흔에도 나 이러고 있는 거 아냐?"
태수의 말 한마디에 스물보다 마흔이 더 가까운 몇은 말없이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왜, 태수대리님은 일 잘하니까, 마흔에도 잘할 것 같은데요?"
스물네 살의 현주가 태수 편을 드는 건지 화를 돋우는 건지 모를 말을 한다.
"아 넌 빠져. 못생긴 게."
"하잉, 과장님, 들었어요?"
창 밖만 보는 내 팔을 흔드는 현주.
아나운서가 꿈이었다는 너는,
언제까지 나와 이일을 하게 될까?
스타렉스는 평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동이 터오는 것도 같다.
달동네
"아직도 이런데가 있네."
한참을 올라온 것 같은데 연탄을 날라야 할 집들은 지금부터 더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으, 추워"
두꺼운 패딩을 목 위로까지 잠가 올려도 시린 다리에 발만 동동 구른다.
회사로고가 큼지막히 박힌 고가의 겨울패딩을 입고 있는데도.
"하다 보면, 더워서 패딩도 벗고 싶어질 거예요"
연탄을 나눠주던 관리자 한 분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연탄을 나르는 일은 어렵진 않다.
중간중간마다 수십 장이 쌓여있는 연탄들을 들여놓아야 할 집까지, 두세 명이 먼저 등에 지고 집 앞으로 옮겨 놓은 후, 대여섯 명이 줄을 서서 집 앞에서 연탄을 놓은 안쪽 구석까지 하나씩 전달해 준다.
무척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집 앞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조차.
두 팀으로 나누어 누가 먼저 할당된 연탄을 먼저 옮기나 내기를 한다.
젊은이들의 시작은 항상 호기롭다.
"과장님은 이런 거 해본 적 있어요?"
"연탄은 안 해봤어, 대학 때 농활은 해봤지."
"농활?"
"농촌 봉사활동. 요즘은 안 해?"
여름이 되면 일손이 부족한 농가를 찾아 간단한 농사일, 배나 고추 따기를 돕기도 하고 잡초를 뽑거나 창고 청소등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었다.
그것은 선의에서 나오는 것도, 학점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한두 시간 잠깐 일하고 나면 내어주는 시원한 막걸리. 그 막걸리가 참으로 달고 시원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곳에선, 나는 무얼 기대하는 거지?
한 집에 들어간 연탄이 틀리지 않게, 세고 또 센다.
한 팀으로 움직이고 있는 태수도, 김 과장도 코끝과 볼 한두 군데가 거뭇거뭇한 게 일하는 티가 난다.
단칸방이라고 부르기도, 왠지 미안했다.
좁디좁은 방 안에 작은 버너와 티브이, 또 한편에는 가재도구 와 침구등이 섞여 올려져 있는 선반 아래 굽은 등을 기대어 앉아 있던 할머니가 기어코 아슬아슬 일어나 연탄을 들고 오는 우리를 맞이한다.
"아이고, 앉아계세요 할머니."
"이렇게 조그만 아가씨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걸 나르고 있어어. 아휴 내가 눈물이 날라그러네."
나는 말없이 입술만 물고 괜찮다는 미소를 짓는다. 그 뒤로 태수의 목소리가 시원하게 방 안까지 들어온다.
"할머니! 그 아가씨 한 거 아무것도 없어. 우리가 다했어"
"내가 줄 것도 없고. 뭘로 갚아야 하나. 아, 잠깐 있어봐"
"어우, 아니에요"
그래봐야 여기에서 저기로.
방 안에서 작은 걸음 하는 할머니를 보다가 입구에 걸린 거울 속에 내 얼굴을 비춰본다.
-고우리, 함부로 생각하지 마.
다 각자의 삶이 있는 거야.
동정이 아닌 존중받아야 하는 삶.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절뚝이며 다가오는 할머니는 소주잔 몇 개를 얹은 쟁반을 가지고 온다.
"아휴, 저희 술 마시면 안 돼요."
"아니, 이거 내가 직접 담근 복분자야. 조금 맛 만 봐. 응?"
"아씨 뭐 해 과장님, 안 마실 거면 비켜. 이게 다 손주 생각하는 할머니 마음이야. 몰라?"
연탄 내려놓고 있는 줄 알았더니, 언제 와서 서있던 태수가 나를 밀치며 붉은 복분자가 든 소주잔을 들어 냉큼 입에 털어 넣는다.
"와, 이걸 할머니가 다 만들었어? 이건 이 세상 맛이 아닌데? 이거 팔면 대박이겠어 할머니"
이 자식..
그 뒤로 유수가 뺴곰하니 안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과장님, 지금 눈 다시 오기 시작한다고 빨리 끝내야 한대요. 몇 분 안 남았어요"
박차를 가한다.
아니, 조금 더 빨리.
눈이 더 쏟아지기 전에 우리가 받은 할당량보다 더 많이 넣어드릴 수 있다면!
아고고 소리 내며 느긋느긋 시작했던 발걸음은 이제,
모두가 연탄을 들고 뛰다시피 걷는다.
하나라도, 더!
계획했던 개수보다 두 배는 더 했다는 관리자의 말에 우린 모두 박수를 쳤다.
그 자리, 아무도 패딩은 입고 있지 않았다.
사람
겨우 세 시간 반 남짓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내지 않는다.
새벽녘의 공기와 사뭇 달라진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사람들이 산다.
보이지 않는다고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다.
막상 마주하면,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창 밖으로는 여전히 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다.
그 안에 각자의 삶의 이야기들을 실은 채로.
"주말 다들 푹 쉬시고, 월요일에 또 병났다고 안 나오는 사람 없도록."
운전대를 잡은 실장이 백미러를 통해 웃으며 말한다.
네. 사람이죠.
서로 등을 기대고 서야 완성되는 사람 인(人).
한 명씩 집 앞에 당도할 때마다 같은 인사를 하고 내린다.
"월요일에 봬요."
하지만 나는.
이조차도 곧.
잊고 살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