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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좀 지켜 (1)

그 창고

by 아는개산책

어둠이 내려앉으면 숨어있던 별빛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한 집 한 집 켜지는 불이 그 빛을 더하다 보면,

낮보다 화려한 건 언제나 밤이었다.


가끔 혼자 집에 남는 어떤 밤에는,

방안 창 너머에서 비치는 불빛들을 보며 마음을 안심시켰다.


그때는 ''말고도 '그들'도 있다는 것이 어느새 두려움을 잊게 해 준다.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를 다 알고 싶어"


위험한 호기심이었다.

아무 이야기도 모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어른이 되기 전의 마음.



오늘도 옷


"과장님 안녕하세요"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현주는 오늘도 특권을 가진 마냥 들떠있다.

20대의 특권.


"할로"


모니터에서 넘겨본 그녀의 생기를 눈에 다 담기도 전에, 쪼르르 곁으로 다가온다.


"과장님, 오늘도 단체티 입었네요"


"뭔데"


"저 이거, 어제 엄마랑 백화점 가서 산 건데. 어때요?"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이다.


어디서 바람이 부나.

앞에서 빙빙 돌아보는 현주가 바람에 나부끼는 코스모스 같기도 하고.


"이쁘죠?"


"이뻐"


정말요? 하고 웃는 현주가 나는 귀엽다.


그리고 예쁘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닌 진심이다.

파란색 점프슈트가 그녀의 몸 선과 그리고 얼굴색과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그녀는 책상옆으로 다가와 바닥에 쪼그리고는 검은 동공이 가득 찬 고양이의 눈으로 나를 본다.


-뭐야, 더 들어야 할 말이 남아있어?


"넌 참 예쁘게 잘 입는 거 같아"

싱긋-


"과장님, 한 번 입어볼래요? 이거 과장님한테도 잘 어울릴 거 같애"


"내가?"


"으응, 입어보고 예쁘면 내가 사다 주면 되잖아요. 물론 과장님이 돈 주면, 응?"


영화나 드라마에서 점프슈트 입은 여자가 나오는 걸 볼 때마다,

한 번쯤 나도 저런 걸 입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저기 사무실 옆에 창고 가서 금방 입어보면 되죠"


"그럴까?"


나이가 무슨 상관,

철은 나이 순 대로 드는 건 아니다.


우리 둘은 키득거리며 창고로 달려간다.



얼음 땡


내가 막내였던 신입시절,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친할 일도 없는 선배 두 명의 일본 온천여행에 꼽사리 낀 적이 있었다.


온천이다 보니 샤워를 먼저 하고 들어가야 했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 것처럼 그 자리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옷을 훌훌 벗고 앞장서 샤워를 시작했었다.

수건으로 앞을 가린 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언니들의 표정이 새삼 떠올랐다.


내가 지금 그런 눈일 테니까.


현주는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지퍼를 한 번에 끝까지 내려 시원하게 옷을 벗는다.


슈트 안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몸은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웠다.


-같은 몸인데, 다르네.


아무 옷이나 잘 어울리는 이유는.

있구나.


"과장님, 빨리 벗고 입어봐요."


그녀는 속옷이 비치는 얇은 슬립만 걸친 채 나를 재촉한다.


-슬립까지 갖춰 입고... 난 아닌데.


주춤주춤 하다 에라, 모르겠다.


회사 단체티, 검은 면티를 먼저 벗고 바지까지 벗어 그녀에게 건넨다.


"입고 있을래?"

"아니요."


떨떠름하다.


"이렇게 입는 건가?"


점프슈트인데도 허리라인이 들어가 있어서 입구가 크지 않다.

발 한쪽을 쑥 넣어 보는데,


'그래가지고, 어, 진짜?'


-뭐지?


문 앞이 소란하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얼음.


나는 현주를 돌아본다.

현주는 나를 쳐다본다.


땡.


'누가 오나 봐요"


현주가 들릴 듯 말 듯 얘기한다.


'너 문 안 잠갔어?'


끄덕끄덕 하는 모지리를 보는 순간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속옷만 걸친 채 한쪽 발만 집어넣은 점프 슈트, 나머지 한쪽 발을 손으로 집어 들고 절뚝절뚝


'숨어, 숨어'


아직 누가 보고 있지도 않은데 내가 입었던 옷으로 가슴팍을 가린 현주도 나를 따라 구석으로 들어간다.


출장 장비가 담긴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가 층층이 쌓여있는 그 뒤로.


속옷만 입고 숨어본 경험이 없으면,

말을 하지 마.


그리고 문이 열린다.

.

.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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