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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게임

실무자

by 아는개산책

한 번 시작했다 하면,

한 번으로는 멈출 수 없는 마피아 게임.


게임은 현실 전투의 연습버전이랄까.


하지만,

막상 현실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사람은 생각보다 뻔하다.


승산은?


당연히 들키지 않는 쪽에.



아메리카노


띠리 리리-


9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책상 위 유선전화가 울린다.

막 업무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수화기를 든다.

인사를 나누기도 전, 숨소리에서부터 느낌이 온다.


-그 여자다.


일주일 전 입찰에 참가했던 그날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넌 뭐 마실래?"


"전 따뜻한 차.. 아니 괜찮습니다."


카운터에서 뒤돌아 묻는 나를 향해 유수가 대답한다.

그 아이는 아직도 두꺼운 입찰서류를 챙겨 넣느라 부산스럽다.


"그래? 응,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이요"


두 개의 커피를 컵홀더에 고정시키고 한 손을 핸들에 얹은 채 유수를 보며 말한다.


"이번 입찰 기획한 사람, 특이해. 분명 공부만 판 사람일 거야."


"네? 네"


이번에 올라온 입찰은 기관이름이 낯설기도 했지만, 입찰 방식은 더더욱 생소했다.


"봐봐, 자기네가 올해 네 건을 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한 회사를 선정해서 네 건을 다 주는 게 아니고, 한 회사는 한 전시에만 지원하래. 그런데 또 신청은 딱 하루에 다 몰아서 받고. 너무 이상하지 않아?"


"네. 그런데 뭐가요, 과장님?"


"이건 가격은 두번째야. 일단 어디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쉽게 해서 적게 벌지, 난투를 해서 크게 가져갈지. 그 싸움이야"


"아.. 눈치싸움이 되겠네요. 많이 안 몰리는 데를 써야 하나?


"안 몰리는 데는 규모가 작아서 남는 게 없는 곳. 독일 같은 건 많이 남지만 그만큼 몰릴 거고."


유수는 잘 모르지만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공부 쪽이 아닌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나는 그 담당자가 궁금하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동을 건다.


"일단 네 개 다 준비는 했으니까, 상황 봐서 정하자, 일단 가자"


-간만에, 재밌겠네에.



마피아 게임


대기실 안은 마피아 게임을 앞둔 전사들처럼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누가, 어디에 입찰을 넣어서, 대어를 낚을 것인가.

빙어 한 마리라도 안전하게 건져갈 것인가.

허탕만 치고 돌아갈 것인가.


"커피 마셔"

"아, 저는 커피 마시면 배가 아파서."

"어, 마셔"

"네"


유수는 마지못해 손에 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쭈루룹 빨아들인다.


"어떻게, 최이사님이 직접 오셨네요, 이제 이런 입찰까지 직접 뛰시는 거예요?"


C사의 김 부장이 N사의 입찰대리인, 최이사를 향해 게임을 시작한다.


N사는 최근 고만고만하게 나눠먹던 블루오션에서 굵직한 국내외 전시를 모두 휩쓸며 서우리만치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다는 최이사.

실무는 안 하지만 밤영업과 뒷거래에 탁월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저희야 뭐, 주면 하는 거고, 안 주면 못 하는 거고 그러는 거죠. 그보다도 고 과장님도 요즘 안 보이는 데가 없다던데요?"


나와는 첫 대면이면서도 오랜 기간 쌓였을 영업력만큼이나 어색하지 않게 말을 건넨다.


마치, 기선제압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돈 주고 하면 무슨 전시를 못 따겠어요."


아차,

감정을 보이면 지는 건데.


선전포고는 내가 하고 앉아 있네.


대기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지며 최이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하다. 타 업체들의 시선이 최이사에게 쏠린다.


"이 담당자는 그런 방식은 전혀 안 통하는 여자라던데, 그럼 이번 독일전시는 고 과장님이 가져가는 건가?"


사람들의 시선은 이번엔 나에게로 향한다.


-정식으로 붙으면, 적수는 되지?


모두의 생각은 같다.

이번처럼 보수적인 담당자는 가볍게 협력사를 바꾸지도 않는다.

첫 단추를 반드시 끼어야 해!


나는 샅바를 단디 잡고 최이사와 씨름하고 있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체급 차이가 있으면 있는대로.


-넘어갈까, 넘길 수 있을까


"네. 독일은 제가 하려구요."


그의 덧걸이에 일단 넘어가 준다.


내 패를 깠으니,

다른 분들은 가격을 더 낮춰보던지, 나머지 세 전시로 눈을 돌려주시지요.


"저, 저 과장님 저 화장실 좀"


옆에서 잔뜩 긴장한 채 커피 한잔을 모두 비운 유수가 말까지 더듬으며 말한다.


"다녀와, 나도 서류 보고 있을 테니까. 서류 나 주고."


유수가 나간다.


어차피 파일은 추후 메일로 제출, 오늘은 협회가 준비한 종이에 입찰가를 적어 제출하고 제안서를 바탕으로 발표만 하면 된다.


다른 업체 담당자들도 저마다 서류를 보며 숙지하거나 연습하는 와중에도 최이사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없이 커피하나 든 채로 방 안을 배회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건다.


-차피 낙찰은 N 사일까..


그의 패가 궁금하다.

나만큼 너도 궁금하겠지.


시간이 흐르면서 한 업체씩 이름이 불리며 밖으로 나가자 대기실에는 나와 최이사 둘만이 남아있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한 채 서류만 보고 있지만, 계속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아... 배가 또..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배를 슬슬 문지르다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난다. 나는 급하게 문 밖으로 뛰어나간다.


서류는,

테이블 위에 있었다.



발표


"발표는 따로 하지 않고, 선정된 업체에만 금일 6시 전까지 메일로 송부드리겠습니다."


내 순서의 피티를 마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가면 된다고 말하는 그녀이다.


직접 눈을 마주치지도 않을뿐더러 전혀 표정변화가 없다. 인사성 미소조차도.


앞에서 비리(非理)의 비 자도 꺼내 들지 못할 얼굴이다.


-정말, 공부만 한 걸까.


내가 아는, 공부만 파던 사람들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


그리고,

메일은 들어오지 않았다.


'탈락'이다.


그로부터 삼일이 지다.

사무실 전화가 아침부터 요란히 울리는 지금은.


"네, H, 고우리입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ㅂ 협회 윤세희입니다"


그녀가 맞았다.


"저... 저번에 넣으신 입찰 건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건 중에 독일 전시회 건에 입찰 넣으셨잖아요?"


"네, 대리님"


"그게 원래 N 사가 선정되어 진행하기로 했었는데, 그쪽에서 포기하겠다고 오늘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차순위였던 고 과장님께 다시 연락드렸습니다, 진행. 하실 수 있으신가요?"


"네, 그럼요 대리님.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내일 저희 협회에 들러 계약 진행 하는 걸로 알면 될까요. 저희도 빨리 진행을 해야 해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유수, 우리 됐어!"


"네? 어떻게요? 떨어진 거 아니었어요?"


자리에서 고개를 빼꼼 들고 유수가 묻는다.


돌아오는 길에, 본인이 서류 준비를 잘 못해서 떨어진 거라고 자책하던 게 생각난다.


-이제 웃자. 유수야


최이사는 손쉽게 판을 주워 먹는 사람이다.

하지만,

실무자는 아니다.


"실무자가 아닌 게 왜요?"


"우리가 준비했던 금액으로 진행하면 무조건 마이너스야."


-그래도 그 회사 실무자는 바로 계산기는 두드려 봤나 보네. 최이사가 잘못 물어온 걸.


"그러니까, 우리가 해도 마이너스 아니에요?"


가격을 높혔으니까.

우리가 떨어졌던거 아니겠니...


"그냥, 일 해."


"아...네에"


유수는 가까이 다가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동작이 큰 새는 오히려 예측이 쉽다.


서류는,

테이블 위에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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