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한 사이에
"언제까지 이런 일 할 거예요?"
신입들은 쉽게 궁금해하고, 또 쉽게 말하기도 한다.
"내 꿈은 이게 아니었는데."
넌 꿈이라도 있었구나.
난 꿈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냥 하는 거야."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아직도 그때의 대화들이 머릿속을 떠도는 건.
나는 정말,
한 치의 후회도 없는 걸까.
그냥 회사원이기만 하면,
괜찮았던 걸까.
오만
-늦었어!
아침 일찍 올려놓기로 한 보고서를 마저 끝내지 못하고 칼퇴를 했었다.
막상 야근이 시작되면,
내 인생에 일이 뭐라고.
이 시간까지 투자해야 해? 배도 고픈데.
라는 생각에 엉덩이를 잠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성격이고 뭐고 달려야 한다.
가을이라 오랜만에 꺼내 입은 먹색 시폰 치마가 뛰는 걸음 앞으로 낙엽처럼 나풀댄다.
"저, 저기요"
집 현관문을 열고 뛰기 시작하는 등 뒤로 남자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나는 아니겠지.
그대로 달린다.
"저기요, 아가씨! 아가씨!"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아가씨나 불러대는 남자와 말 붙일 여유는 없다.
한번 흘긋 돌아본다.
오- 젊다.
헉헉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으며 버스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빨리 좀 와라아아아.
버스 엉덩이 차듯 오른쪽 구둣발로 땅을 탁탁 찬다.
시계 한번, 차 오는 방향 한 번.
그 사이 한 아주머니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도'인가. 하. 오늘 왜 이래.
"저, 아가씨."
대답 대신 흘끔 아주머니를 한번 쳐다본다.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대고 얘기한다.
"뒤에 치마.. 먹었어요"
뭘?
먹어?
무심결에 손을 엉덩이 쪽으로 가져가니 있어야 할 치마가 잡히지 않는다.
가을바람 서늘하다고 스타킹 속으로 쏙-
"으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치마를 마구 잡아 뺐다.
동시에, 집 현관 앞에서부터 나를 애타게 부르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망했어.
뒤뚱뒤뚱 뛰어가는 내 뒷모습을 안타깝게 보고 있었을 그분을.
앞으로 사는 날 동안 다신 마주치지 마요.
방심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어디에 계시던 즐거운 일만 가득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SEND.
몇 해 전 이미 다른 부서로 지방발령을 받은 협회 담당자에게 문자로 안부를 전한다.
당장 일로 엮여 있지 않더라도, 실수 투성이 신입 때부터 꿋꿋이 믿고 일을 맡겨 주시던 그분에 대한 소소한 인사였다.
그런데, 바로 답장이 온다.
+과장됐다면서요? 나 다시 서울 올라왔어, 오늘 전시부 회식인데 놀러 와요. 하대리한테 주소 보내라고 할게+
"네?"
휴대폰을 보는데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곧, 문자가 아닌 휴대폰이 다시 울린다.
"고 과장님. 안녕"
"아, 대리님. 김팀장님 다시 왔다고?"
"어. 말 안 했나? 이번 달부터 다시 서울 사무소로 출근하셔. 오늘 우리 부서회식 온다며?"
"어... 그런데 내가 왜 너희 부서 회식을 가?"
"몰라 나도. 팀장님이 너 함 보고 싶은가 보지. 난 야근 할랬는데 너 오면 잠깐 가야겠다. 올 거지?"
으응?
오랜만에 마주한 김팀장의 얼굴은 3년 전과 하나 달라질 게 없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부담스럽지 않게 던지는 농담까지도.
하지만 그분도 그 몇 년 사이에 굴곡이 있었고, 개인사를 들으며 속도를 쫓다 보니 어느새 나도 입고 있던 분홍색 니트만큼 얼굴이 발그스레하다.
"오늘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기분이 아주 좋네, 참 김대리 거기 전화 넣어"
"네? 거기? 어디요?"
처음 보는 얼굴, 김대리라 한다.
"어 거기 있잖아, 우리 이번에 입찰 없이 진행되는 거, D사 전화해서 협력사는 여기 고 과장 회사로 진행하라고 해, 안 그래도 아는 데 있냐고 어제 전화 왔더만. 어? 당장 전화해"
"아, 네네"
김대리가 휴대폰을 가지고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와우, 감나무 보러 왔는데 배가 떨어졌다!
나는 실적도 챙겼겠다, 술도 취했겠다,
벌떡 일어나 외친다.
"2차는 제가 쏘겠습니다. 가시죠!"
위선
"이런 데 와봤어?"
옆에서 혼잣말처럼 말하며 안으로 먼저 들어가는 하대리의 말대로 그런 곳은 처음이었다.
"와. 좋다"
뭐가.
바 앞의 높은 의자에 나란히 앉은 하대리는 한번 더 보충설명한다.
"비즈니스바.라고. 팀장님이 좋아하는데야. 아마 양주 맡겨놓은 게 있을 거야."
"비즈니스바..."
조용히 중얼거려 본다.
눈이 부실만큼 환한 조명 아래, 중앙에는 둥근 바를 두르고 안쪽에는 당장 연예인을 해도 손색없을 만큼 예쁜 분들이 한 잔씩 술을 따라주고 또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마치.
친구처럼.
"여기 오늘 계산할 과장님이야. 잘해줘야 돼"
팀장이 나를 가리켜 그렇게 말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다른 담당분과 반가운 인사를 한다.
"와, 나이도 어리신 것 같은데, 벌써 과장님이세요? 대단하시다"
그녀는 웃으며 술 한잔을 나에게 건넨다.
몇 잔을 그렇게 받아넘기다 보니 정말 내가 뭐라도 된 것만 같다. 그리고 친구들과는 또 다른 관점으로 한 번씩 맞장구를 치는 그녀의 화술이 나는 점점 좋아진다.
몹쓸 호기심은.
멈춰야 할 때 오히려 더 적극 샌다.
신입의 그것처럼.
"언니는, 왜 이런 일을 해요?"
"언니? 호호, 편하게 수 라고 부르세요. 과장님은 무슨 일 하는데요?"
"저요? 저는..."
나는 잠시 술잔을 바라보다가 주머니 속에서 명함하나를 꺼내어 바 위에 올려놓는다.
"영어만 조금 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관심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때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박아놓은 듯 유지되던 보석 같은 미소가 잠시 사라졌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내 다시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말한다.
"과장님, 재밌는 사람이네. 후훗"
명함은 바 위에 올려진 그대로이다.
맥주에, 소주에, 양주까지는 역시 무리였나 보다.
나는 밖으로 나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잠시 오른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하대리가 나온다.
"어? 간 줄."
"나? 아직. 담배피러?"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자담배를 꺼내 한 모금을 빤다.
후-
"고 과장님"
"응? 갑자기 존대?"
"훗. 아니. 그렇게 안 봤는데."
"뭘?"
뜬금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아니야,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지. 내가 팀장한테는 말해줄게"
후-
담배 연기가 냄새도 없이 빗방울 사이로 흩어진다.
하지만 그의 그 한마디는.
그대로 멈춘다.
치료
출근.
퇴근.
출근.
퇴근.
기사님 한 분이 침대 위, 벽에 매달려 있는 에어컨을 청소하고 있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미친년인가?"
조용히 숨어있던 하대리의 한마디가 삼일 만에 떠오르더니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온다.
-헉, 무시한 거야.
뭐야.
전혀 알아채지도 못했어.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나는 열려있는 사람인데.
어떤 것에도 편견이 없이,
각자의 사정을 존중하는 사람인데.
아니.
그렇게 보이려고 애썼는데...
-새나갔어. 내 위선이.
"끝났습니다."
퍼뜩 정신이 든다.
"아 네네"
이불 위에 떨어진 먼지들을 보며 오늘은 세탁기에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예요?"
지갑을 열어 아저씨가 말해주는 금액을 세어본다.
-이상하게 낯이 익네. 여기 원룸 전체 관리하시나...
돈을 내어드리고 꾸벅 인사를 한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던 아저씨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한다.
오- 젊다.
"가보겠습니다, 쉬세요."
"감사합니다!"
문이 탕 닫히면서 나의 뇌도 탕 울린다.
그, '아가씨!'...?
죽어라 죽어.
오늘은 세탁기에 이불이 아닌 내가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내 안에 끼어있는 오만과 위선같은 감정들이 씻겨 떨어져나갔으면..
지이잉-
문자다.
아직 현실 인간들을 마주할 채비가 안되었는데.
+과장님, 안녕하세요 저 수예요. 내일 점심 먹으러 가도 돼요? 명함보고 연락드려요+
세탁기를 쳐다본다.
살았다.
그녀가.
내 위선을 받지 않았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