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헌신 (3)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그래서
소원은 구체적으로 비는 게 좋다고 하는 걸까.
겹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중요한 건.
어차피 타이밍이겠지만.
마리아의 손
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쥐고 계단에 앉아, 아직 사람이 뜸한 광장을 멍하니 쳐다본다.
아이스크림은 사랑이기도 하고,
터키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아저씨 기분이 오늘은 아니었나.
아무 장난도 치지 않고 아이스크림만 주고.
이거. 오늘 나의 운수인 건 아니겠지?
좋지 않아-
오전 일찍 전시장을 나가긴 했었다.
"고과장님! 안녕하세요! 협력사면 오늘은 안 나와도 되지 않아요?"
한국관 근처에 막 도착해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박주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네. 그래서. 지금 나가려고요."
하지만, 내 눈은 여전히 부스 주변을 훑고 있다.
"네? 지금 오신 게 아니구요?"
오. 눈치 무엇.
"저 그런데. 김차장님은요?"
"아, 시준이요? 새벽에 도착해 가지고, 좀 자고 나온다고 하던데. 왜요?"
"협회 담당자니까... 인사 드리려고."
"아아. 지금 없어요, 아님, 저희 부스에 좀 앉아 계실래요?"
그렇게 업체들 다 돌면서 한 번씩 인사를 마칠 때까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에 도착했으면. 피곤할 만도 하지."
다 먹은 아이스크림 종이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일어나서 엉덩이를 툭툭 턴다.
오늘은 저거다.
딱히 나를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손가락을 가리킨다.
아야소피아 성당.
-아. 어릴 때 내가 예술을 좀 공부했으면, 이런 걸 직접 볼 때마다 느끼는 게 다를 텐데.
지식에 대한 아쉬움은 나이가 들 수록 더해진다.
항상.
지나 봐야 안다.
"엄청 크네."
첫 발을 들이자마자 탄성이 나온다.
건축이나 디자인에 까막눈이지만서도.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다는데 한표.
시선이 한 바퀴를 쭈욱 돌다가 사람들 몇이 모여 있는, 한 기둥에서 멈춘다.
-저건 꼭 봐야 하는 건가 보네.
가까이 다가간다.
"뭐지? 그림인가?"
"아뇨, 마리아의 손 기둥이요"
깜짝아,
한국말?
옆을 돌아보니,
그다.
"헉, 김차장님"
"헉, 고과장님"
말투를 따라 하는 게 아직 덜 아픈 것 같은데.
그래도.
숨바꼭질을 하다 찾아낸 것만 같은 건.
"지금, 전시장에 계셔야 할 시간 아닌가요?"
처음 횟집에서 만났을 때의 그, 웃음기 없는 건조한 말투.
"아니, 차장님이야말로. 잔다던데..."
"누가요?"
아차, 누가?
"아닌가. 꿈인가."
"하. 저는 전시마지막날 업체들 모시고 관광해야 해서 먼저 답사 좀 왔습니다."
마스크 위로 안경테를 올리며 말한다.
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인다.
"돌려보세요."
"뭘요"
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본다.
"흠. 고개 말고, 여기. 마리아의 손기둥. 엄지만 넣고 나머지는 쫙 펴서, 한 바퀴를 돌릴 수 있으면. 마리아가 소원 들어준대요."
검정뿔테에 검정 마스크까지 쓰고 손을 쫙 펴서 시범을 보인다.
"차장님이 먼저 해보세요."
"저는 소원 같은 거 안 믿는데요."
"그런데 왜 알아요?"
"상식이니까요."
"정말요?"
"아니요."
나는 이런 사람이랑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빌고 싶은 소원은 있다.
이미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작은 구멍 속으로 엄지를 끼어넣고, 네 손가락은 펼친다.
그리고, 돌리면서 소원을 빈다.
'저의 상처를 다 이해해 주고 품어줄 수 있는 좋은 남자가...'
에에취!
그가 재채기를 한다.
감기?
싶은데, 한번 더.
에에취!
성당 안이 떠나가라 기침을 하는데,
'아씨 김차자앙! 아, 아니. 이건 소원이 아니고요'
손가락은 한 바퀴를 다 돌았고 언제부터인지 우리 뒤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아...
성당을 나온다.
흔들흔들
어느새 하늘의 색이 바뀌어있다.
-푸른 건가? 붉은 건가?
나는 얇은 카디건을 다시 한번 여미며 계단을 딛고 올라간다.
그러면서 흘끗 김차장 쪽을 쳐다본다.
"왜 보세요?"
직급이 올라가면 동서남북에 눈이 달린다.
"어디 안 가세요? 저는 호텔로 갈 건데."
그는 대답하지 않고 옆으로 나란히 걷는데만 집중한다.
이렇게.
서로가 말을 하지 않는 순간엔,
눈빛도. 숨결도. 스쳐간 미소까지.
재해석되기 시작한다.
그는. 그것을 잘 다룬다.
호흡.
굳이 말하지 않고,
나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호텔 가서 뭐 하시게요? 오늘 전시 끝나고, 친해진 업체들 몇은 술 한잔씩 한다던데요."
"어디서요?"
"탁심."
띡-
띡-
티켓을 찍고 개찰구로 들어간다.
시내 쪽이 아닌 다시 외곽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버스 안엔 사람이 많지 않다.
먼저 들어가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일인용 의자에 털썩 앉는다.
뒤따라 들어온 그는 빈자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옆자리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든다.
-그래도 사십 분은 가야 하는데. 앉아서 가지.
생각은 들지만,
친절하게 굴면 위험할 것 같다.
업히기까지 한 주제에.
터키 가을 무시하고 얇은 가디건만 입고 나왔더니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
코 끝을 한번 만져보고 이마에 손을 대본다.
-차네.
뜨거울 줄 알았더니.
흔들흔들 버스가 흔들리고,
흔들린다.
흔들흔들.
말이 없는 순간이.
가장 좋다.
회피 반사
띡-
띡-
개찰구를 나와 승강장과 연결된 육교를 오른다.
-육교만 건너면 전시장인데.
"전시장은 안 들르세요?"
"고과장님은요?"
"저는, 감기기운이 있어서 들어가 보려고요."
"가시죠."
그니까.
어딜.
그와 나는 한 발정도의 보폭차로 걷는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그냥 남.
-진짜 남이지, 뭐.
전시장을 지나 오른쪽의 호텔로 방향을 트는데도 그는 말도 없이 옆에서 걷기만 한다.
혼자 돌아다닐 때 나는,
오히려 더 말이 많은 것 같다.
호텔 입구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그와 마주 선다.
"호텔 가세요?"
"몸 안 좋으세요?"
"저보다 차장님이 안 좋죠."
"얼굴이 빨간데."
"진짜요?"
손을 대 보지만 열감은 없다.
그런데 말수가 적은 그가 손을 뻗는다.
-이마?
아니,
볼에 댄다.
나는 눈만 깜박이며 검정테 너머의 눈을 바라본다.
-지금, 어둡나?
그게 왜 중요해?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고우리.
눈이나 감지 마.
.
회피반사 -갑자기 다가오는 물체를 보았을 때 눈을 감거나 돌리는 반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