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트리흐트를 아세요?
낭만이란-
사전적 정의
: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심리 상태 또는 그러한 분위기.
그렇다면,
낭만을 모른 채 사는 게
편하겠어요.
나는. 현실에 얽매여 사는.
직장인이니까.
환승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기차가 들어선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트렁크 하나를 조심스럽게 먼저 내린 후 뒤이어 내가 살짝 뛴다.
주머니에서 미리 프린트해 둔 기차표를 꺼내어 시간과 플랫폼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마스트리흐트라... 여긴 또 어디 붙어있는 거야..."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만 알면 되는 거 아니었어?
트렁크를 질질 끌고 마스트리트행 기차가 있는 플랫폼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출발을 앞두고 막 문이 닫히려 하는,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 밝은 회색의 긴 기차가 눈에 들어온다.
-어, 저건가?
뛴다.
한국에선 잘 걷지도 않는데.
"내 번호가... 1 호면 맨 앞인가?"
짧은 뜀박질로 앞으로 달려가지만 앞 호실에 도착도 전에 기차가 출발할 것만 같다.
일단 기찻길에 빨간 점 하나 찍힌 듯 서 있는 붉은 베레모의 승무원에게 먼저 다가간다.
-도움이 될지, 낭비가 될지. 일단 부딪혀.
그녀에게 들고 있는 표를 보여준다.
그러자 바로 본인이 서있는 그 중간 칸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손짓을 보인다.
-맞게 본거지? 이거 1이라고 쓰여있는데.
다시 한번 표를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호수를 가리킨다.
"그래, 여기로 들어가."
다소 딱딱한 말투.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 매 순간 성의를 다할 순 없겠지.
하. 중간칸에서 맨 앞칸까지 가려면.
안에서 또 그 좁은 통로를 얼마나 걸으라고.
그래도.
덩치가 크니까.
일단 말을 듣자.
나는 낑낑 대며 트렁크를 계단 위로 먼저 올리고 몸을 집어넣는다.
그때, 등 뒤에서 쌀쌀하게만 보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앞 칸은 나중에 갈라져서 다른 지역으로 갈 거야. 좋은 여행 돼요"
OOPS.
마스트리흐트 거리
도착이다.
시계를 보니 예정된 시각에 정확히 떨어졌다.
"와 씨. 나 또 헤맬뻔했어."
-그 승무원이 아니었다면...
무표정의 딱딱한 말투였던 그 독일 승무원이 갑자기 한적한 시골마을의 인심 좋은 푸근한 아줌마로 떠오른다.
-고우리 편견 쩐다.
뒷목이 빳빳.
작은 돌들이 뭉쳐있는 그대로 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 돌 길을 걷는다.
바퀴가 작은 소형트렁크라도 무게가 꽤 있어 돌 틈에 끼기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은 내가 들고 가야 하는 모양새다.
"네덜란드면 선진국 아닌가. 길들이 왜 이래."
이름도 생소한 그 마을.
삐까뻔쩍한 서울에서 몇 년 살아봤다고 선진국 타령 하고 앉아있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짐을 풀기도 전에 미리 연락해 둔 아르바이트 생에게 문자를 보낸다.
+안녕하세요, 고우리입니다. 내일 아르바이트, 이상 없으시죠?+
전송을 누르자마자 휴대폰을 휙 침대 위에 던져놓고 쭈그려 앉아 트렁크를 연다.
-배가 고프다아. 햇반, 햇반.
지이잉-
"이 시간에?"
회사만 아니어라.
휴대폰을 열어보니 아르바이트 생에게 문자가 와있다.
+안녕하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실래요? 숙소 알려주시면 근처로 제가 가겠습니다.+
"배운 사람이네. 설마, 하루 일당 더 달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중얼거리며 벗어놓은 떡볶이 코트를 다시 둘러 입는다.
집 앞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일러준 카페명이 붉은 천 위에 하얀 고딕체로 적혀 나풀대는 게 보이고, 그 아래에 '여기요'하며 한국인 학생 하나가 손을 흔들고 있다.
여자고 남자고 체격 자체가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한국인 남성이.
저렇게 조그맸나.
그가 앉아있는 야외 테이블로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고과장님? 앉으세요. 남우현이라고 합니다."
속눈썹이 길다.
"안녕하세요."
그도 굳이 일어나지 않았고 나도 굳이 주머니의 손을 빼지 않은 채 옆의 철망의자 하나를 발로 끌어 간격을 만든 후 자리에 앉는다.
그런 나를 보고 우현이 한번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 무언가를 싸는데 집중한다.
"뭐 하세요?"
"아, 이거 담배요."
"네? 담배를 이렇게?"
"네, 여기선 종이랑 잎만 사서 말아서 피우기도 해요. 이게 더 싸서. 헤헤"
아...
"아~ 그거, 합법이긴 한데, 저는 안 해요."
아...
"펴보실래요?"
고개만 도리도리.
"배고프시죠? 일어날까요? 뭐 좋아하세요?"
주머니에 넣어둔 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무심코 쳐다보니, 그도 나처럼 유행이 지난 떡볶이 코트를 입고 있다.
떡볶이 코트 둘이 나란히 길을 걷는다.
머리칼이 뒷덜미까지 덮고 있는 게, 약간 미완성의 오스칼 느낌도 나고.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정-갖다 붙이면, 미소년 느낌도 나고.
-어쨌든 돈 없어서 담배도 말아핀다는데. 밥이라도 맛있는 거. 고기 먹여야 하나?
"네덜란드는 처음이세요?"
"여긴 처음이에요."
"아..."
"우현 씨는 여기서 뭐 하세요?"
보통 유럽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다 보면,
대부분이 한국 유학생.
나이는 제각각이어도, 배우고 싶어 타국까지 넘어온 그들은.
한결같이 빛이 났다.
너는 무슨 빛이니.
"저는, 기타 배워요"
법대, 공대, 건축, 성악 많은데 하필.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떨어뜨린다.
그의 두 손은 이미 코트 주머니 속에 잘 모셔져 있다.
"아.. 저희 일. 손 다칠 수 있는데."
"네, 조심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다시 한번 미소년이 웃는다.
-일은. 해본 적이 있을까. 내일. 망치면 안 되는데.
돌바닥을 다시 걷는다.
"바닥에 돌이 많죠. 왜 그런지 아세요?"
그렇지 않아도 바닥이 얇은 스니커즈라 울퉁불퉁의 질감이 유쾌하진 않다.
"그러니까요. 아까 트렁크 끌고 오는데 죽을 뻔."
내 말에, 그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웃으며 답한다.
"네덜란드는 아직 낭만을 사랑하거든요."
딱-
시간이.
멈춘다.
어떻게 그런 문장을 말로 하지? 싶은 그의 말 한마디를 신호로.
놓치고 있던 그 광장의 풍경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둥근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개성 있는 노상카페들.
마주 앉기보다는 나란히 앉는 쪽을 택한 채 책을 보거나, 대화를 하거나.
해 지는 오후의 공기에 나른하게 녹아 있는 무심한 여유.
광장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입구로 시선이 따라간다.
작은 알전구로 휘감긴 가로등. 그리고 그 가로등마다 연결해 놓은 실들 사이사이에 커다란 눈꽃과 지팡이 모양의 장식품들이 누여지는 마지막 햇살에 반짝이며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는 저번달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예요."
말소리를 따라 그를 돌아보니,
잠시 멈춰 선 우리 앞으로 사람들이 걸어간다.
한 손엔 할머니의 손을, 한 손엔 지팡이를 쥐고 굽은 허리 그대로 걸어가는 백발의 할아버지.
그 뒤를 꼬리를 살짝 든 채 느긋하게 걸어가는 고양이 한 마리.
나는 휴대폰을 꺼내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나의 눈 속에 사진처럼 저장한다.
"잘 오셨어요, 마스트리흐트"
그가 씨익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이런 게.
마스트리흐트.
네덜란드야?
그것보다.
낭만이라니?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