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E TO THE MOON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현장
아직 전시품 설치가 한창 진행 중인 전시장 안, 비어있는 부스에 쪼그리고 앉아 휴대폰을 켠다.
8시 05분.
+언제 오시나요+
SEND.
8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이 싸람이 아직도 낭만 꿈을 꾸고 계시나.
이래서 낭만은 위험해.
뭔가. 비겁한 단어 같잖아.
-예쁜 건. 그냥 예쁘다고 하면 되지.
무릎을 모아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턱을 기댄다.
시선의 직진방향, 출구 쪽에서 기다리던 미소년이 등장하는 것이 보인다.
"또 떡볶이 입고 오셨네. 커플템인 줄 알겄어."
나를 발견하고 뛰기 시작하는 떡볶이와 청바지. 그리고... 구두?
"아니, 일하러 오면서 구두 신고 오시면 어떡해요."
나는 일어나서 엉덩이를 툭툭 턴다.
"네? 아, 운동화를 빨아서. 하하."
"하... 오늘 많이 걸어야 되는데."
"네, 가능합니다. 뭐부터 할까요?"
예전 독일 전시회에서 한 알바생이 정장구두 신고 왔다가 오후에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 떠올랐다. 어디냐고 묻는 내 문자에,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서 도저히 못한다 했던가.
나는 입술을 한번 삐죽이고는 그에게 업체리스트를 펼쳐 보여준다.
쩝.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여기, 여기, 여기, 여기는 지게차 필요한 곳, 지게차는 항상 느리니까, 신청 미리 해야 하고. 그전에 손으로 할 수 있는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먼저 하자고요."
"네. 지게차..."
"지게차. 아시죠? 포크리프트. 무거운 거 드는 거."
손가락 두 개로 들어 올리는 흉내를 낸다.
-이런 노동을 해봤을까.
들고 있던 종이를 같이 보고 있던 우현은 내 눈을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네, 알아요."
내가 웃겨?
왜 자꾸 웃어.
"그럼, 시작할게요."
그는 복사본 한 장과 내가 건넨 목장갑을 손에 들고 전시장 안쪽으로 사라진다.
제발 세월아 네월아 말고, 도망가지도 말고, 빨리 끝나게 해 주세요.
지게차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우현의 모습은 눈에 띈다.
뛰어다니는 사람은 그 밖에 없어서.
"우현씨, 우현씨!"
우현이 목장갑으로 땀을 닦으면서 내가 서 있는 부스로 걸어온다.
"힘들죠? 이제 한두 시간이면 업체분들도 올 거라, 그전에 지게차 끝내야 하는데..."
"지게차요? 제가 아까 사무실 가서 신청은 했는데."
"시스템이라서. 신청해도 엄청 느려요. 이휴. 걱정이네."
"저, 잠깐만 옷 좀 벗을게요."
그는 드디어 코트를 벗어 부스 구석에 접어놓고는 브라운색 니트 끝단을 단정히 매만진다.
그러다 멀뚱히 쳐다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말한다.
"덥네요."
"네."
"아, 지게차. 제가 불러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가 다시 뛰어나간다.
목 뒤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가 슬로모션처럼 따라 흔들린다.
-저런 친구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
갑자기?
그냥.
마음이 시끄럽지가 않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노란 지게차 한 대와 그 옆에 나란히 걸어오는 우현이 반갑다.
나도 운전석 가까이 다가간다.
"어디 어디 가야 하는지 말했어요?"
"네, 그런데 아직 부스번호가 위에 안 붙은 곳도 많아서 좀 헷갈리나 봐요."
"아. 그럼..."
코 밑 수염도 체구도 산타 느낌의 기사는 핸들에 상체를 기대어 나를 내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좌석도 없는 그 자리를.
"?"
"아, 타실래요?"
"여기를요?"
우현은 다시 기사랑 무슨 무슨 얘기를 하는데, 내가 못 알아듣고 있으니 영어는 아닌 걸로.
벤츠. 벰 더블유. 아우디. 지프.
여러 것도 타봤지만.
지게차는 처음이다.
그런데.
지게차에 올라탄 나는
어느새 깔깔거리고 있다.
일은 지게차가 하고.
나는 놀이기구를 탄다.
Fly me to the moon, Let me play among the stars
플라이 미 투 더 문, 렛미 플레이 어몽 더스타즈,
아저씨는 쉬지 않고 장비 조작을 하면서도 자꾸만 노래를 흥얼거린다.
진짜 나를 달에 데려가기라도 할 거야?
"나 쟤 친구야. 저 아인 최고야"
아래에서 지게차 포크에 걸린 장비를 잡고 위치를 맞추는 우현을 가리키며 기사가 뜬금없이 엄지를 추켜든다.
그의 시선을 따라 우현을 찬찬히 훑어본다.
바닥에 엎드려 장비 기울기를 보는 우현의 니트가 세탁기로 돌릴 수 있는 재질일까 궁금해진다.
누구에게든.
부드러운 니트 같은.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구나.
당신.
FLY ME TO THE MOON
"저희 공연 보러 오세요."
작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그가 있었으니까.
"공연요? 공연도 해요?"
우현은 멋쩍게 뒷 머리를 긁적인다.
"공연이라 하기엔 그렇고. 그냥 친구들이랑 연주하고. 연습도 하고 하는데. 할 거 없으시면요."
"네, 이따 연락드릴게요."
몸은 이미 피로에 녹을 데로 녹아있고.
특히나 해가 진 이후에는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아마. 가진 못할 것이다.
했는데 앉아있다.
삶은 늘 계획대로 되진 않는다.
원형의 높은 테이블에, 발도 닿지 않는 둥그런 의자에 앉아 흔들흔들, 감자를 바짝 구운 것 같은 스틱을 하나씩 집어 먹는다.
회벽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지하실 앞 쪽, 무대처럼 꾸며진 곳에 악기들이 세팅되고 있다.
오도독. 오도독
딱딱한 스틱만 씹는다.
"과장님"
반가운 목소리.
우현이 떡볶이 코트도 니트도 벗은 채 검정 면티를 입고 서 있다.
"무슨 음악 나오는 거예요? 락?"
"하하. 와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좋아하는 노래 있으세요?"
"노래요? 저 노래 잘 모르는데."
갑자기 물어보면 더 모르고.
아, 낮에 들었던 fly me to the moon. 이 떠오른다.
"플라이 미 투더 문.?"
"아, 오케, 그럼 잘 듣고, 가시고 싶으실 때 언제든 가세요. 편하게 하시면 돼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가 핀다.
사탕 세 개가 나타난다.
피식. 웃음이 난다.
알사탕.이라는 한국어가
오늘은 웃기다.
어느 정도 세팅을 마치자 나름 장내 조명은 어두워지고 무대만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초보 같진 않네."
초보는 무슨!
이라는 식으로 드럼을 딱. 치자마자.
나는 음악을 모른다.
재즈도. 락도. 기타도 모르지만.
귀로 들어오는 건 음악의 장르나 해석이 아닌,
선율. 이야기. 심장박동. 떨리는 마음.
도대체 음악이 뭐냐.
뭔데 이렇게 심장이 요동치는 거야?
우현은 다른 사람이다.
양손의 움직임이 다르고,
사람이 저렇게 기타를 빨리 칠 수도 있어?
그리고.
기타만 보면서
왜 저렇게 웃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노래 속에서 어떤 게 기타음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도 없다.
하지만.
취한다.
깨기 싫은 꿈.
"오오오!~"
환호성과 박수가 중간중간 이어진다.
멋. 그 자체.
멋. 그 자체.
"hey"
손가락 하나가 테이블을 톡 친다.
옆을 보니, 수염 가득한 산타 아저씨가 작은 맥주병 하나 들고 서 있다.
"oh!!!!"
아저씨는 눈을 스르르 감고 리듬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몸을 흔드는 건지, 박자를 맞춘다.
타는 리듬이 정확하다.
연달이 두세 곡의 강한 비트의 음악이 끝나자, 순간 고요해지더니 조도가 낮아진다.
붉은 라이트 하나가 우현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어느새 우현의 앞엔 스탠드 마이크도 놓여있다.
한번 흘끗,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Fly me to the moon, let me play among the stars"
"나를 달까지 날아가게 해 주세요, 별들 사이에서 놀게 해 주세요"
"In other words, hold my hand, in other words, baby, kiss me"
"다른 말로 하자면, 내 손을 잡아줘요, 다른 말로 하자면, 키스해 주세요"
"Fill my heart with song, and let me sing for ever more"
"내 마음을 노래로 가득 채워 주세요, 그리고 내가 계속 노래하게 해 주세요"
"You are all I long for, all I worship and adore"
"그대는 내가 갈망하는 모든 것, 내가 숭배하고 동경하는 모든 것"
낭만은.
우현이라는 사람이 사랑하는 거였네요.
그 낭만이 가득 한 곳이
마스트리흐트라면,
나도 이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