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가 돼.
모두가 안녕이라 말하지만,
모두가 안녕할 순 없다.
모두가 내일 보자고 말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내일이 오진 않는다.
늘 사람들 속에 있지만,
돌아보면 결국 혼자.
그런 곳이.
바로.
회사.
회사의 공식
조용하던 사무실에 또 한 번 짜증과 욕설이 총알이 되어 날아오른다.
"아, 넌 쫌 하라면 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
"하기 싫어? 나가고 싶어? 그럼, 그냥, 나가, 아우씨"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바닥에 확 내팽개치자 간당간당 매달려 있던 스테이플러 알이 빠지며 낱알이 된 종잇장들이 둥 둥 떨어진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에,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뒤돌아 안대리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팀장의 앞에 서서.
말의 내용이 아닌, 초연(烟)에 타들어간.
그 어깨를.
안대리는 주저앉아 흩어진 서류를 줍고는 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나의 뒷자리.
팀장은 분이 덜 풀렸는지, 남은 욕을 뱉어내며 자리를 박차고 사무실을 나가버린다.
그의 뒷모습을 좇다가, 안대리에게 채팅을 보낸다.
+잠깐 나가자+
화단이 있는 쉼터로 가는 길까지도 그녀는 고개만 숙인 채 말이 없다.
말을.
잊어버린 사람 같다.
죄인도 아니면서.
그 뒤를 서림은, 뭐 먹을 게 있다고 따라온다.
먼저 벤치로 가서 앉고 그녀가 건너편에 툭 걸터앉는 것을 지켜본다.
"언니, 왜, 왜, 팀장 또 왜?"
서림은 앉을 생각도 않고 바로 궁금한 것을 묻는다.
아직, 공기가 진정되지 않았는데.
안대리는 고개만 숙이고 말이 없다.
나도 그저 바라만 본다.
몇 분의 침묵 후에야 그녀가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낸다.
"베트남 전시. 파트너가 못한다고 한 건데, 자꾸 하게 만들라고 하잖아요."
"왜 못한다고 하는 건데?"
"자기네도 방법이 없대요. 이거 누구한테 물어봐도 다 안된다고. 아이템이 특수해서."
"누구한테 물어봤는데?"
"A 사요."
"걔네 말고, 다른데도 물어봤어?"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이거 그냥 못하겠다고 해, 언니"
서림이 그게 뭐 어렵냐는 듯이 말하며 화단 속 꽃 하나를 꺾어 잎을 하나씩 뜯는다.
그녀는 사장 지인의 소개로 입사한 이후, 누구에게도 욕은커녕 큰 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일을 잘하기도 했지만, 그냥 싹싹한 것과는 또 다른, 관계를 만들 줄 아는 아이였다. 위 아래 할 것 없이.
그에 반해, 안대리는 융통성이 없이 규칙만을 준수하는 스타일.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것을 두고 보지도 못하지만 마음은 여려 싫은 소리는 또 잘 꺼내지 못한다.
결국 마음의. 화.로 남는 경우가 많다.
"파트너가 안된다고 했다니까 저 난리잖아요."
안대리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도.
"왜, 다른데도 메일 한 번씩 넣어보지."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다면 100프로 방어가 힘들어. 99프로까진 해놔야 돼..
추궁이 아닌 염려야.
"그냥. 하기 싫어요."
"왜."
"만약 과장님이 시킨 거였으면, 할 거예요. 그런데 팀장한테 그렇게까지 해주기 싫어요."
그건, 예상 밖의 대답이다.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사람이 싫어서 일도 어려워진 거다.
그건 오히려 더.
변명이 안돼.
"안대리. 사람 가리면서 일하면 안 돼."
"항상 그런다는 게 아니고. 지금 이번 건은 말이에요."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짓는다.
"팀장은 원래 저 싫어했어요. 저도 이제 팀장이랑 말 섞기도 싫고요."
나는 단순 동료 이상의 감정으로 그녀를 애정한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 친구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네가 맡은 거니까, 끝까지 다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그때 안된다고 말해. 다시 해봐."
"하... 후..."
깊은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감정은 버린다.
일만 한다.
성과가 곧.
목소리의 크기를 만든다.
안대리...
그냥 공식 같은 거야...
시뮬레이션
나 역시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대리의 일을 떨쳐 낼 수가 없다.
만약 나였다면...
-나라면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일하진 않지.
잘난 척할 거면 생각 때려쳐.
두 번째.
내가 안대리의 성격으로 빙의를 해서,
나보다 타인의 감정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이라면.
이럴 때...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
그나마 팀장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고과장이 나서서 대신 일을 맡겠다고 보고한다.
팀장은 고과장에게 일을 맡긴다.
-그러면서. 안대리를 무능하다고 생각하겠지.
이것도 탈락.
세 번째.
내가 대신 대체 파트너를 찾는 것과 동시에 이미 거절했다는 A사에도 친분을 이용해 어깃장을 놓는다. 그렇게 막힌 부분을 뚫어주면.
곧이곧대로인 안대리 성격에,
-제가 아니라 고과장님이 다 한 건데요.
-내가 널 시켰지 고과장 시켰어? 아우 씨
뻔하다.
탈락.
네 번째.
안대리를 설득한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처음 디뎌야 할 계단부터. 차근차근...
내가 아는 모든 화술과 설득력을 이용해서 그녀를...
넌 그냥 사원이 아니고 대리라고.!
-이미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 통할까.
결국 머릿속 모든 시뮬레이션을 망친 나는, 두리번두리번 책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다가간다.
-거의 다 추리소설 아니면 만화책이네.
그러고 보니 난 한 번도.
상사나 동료의 도움을 구해본 적이 없다.
지나치게 독립적인 사람은,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힘들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책 제목이 있다.
-계발서 비슷한 것도 있긴 있네.
설득의 심리학을 집어든다.
대리일지, 팀장일지. 누굴 설득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읽는다.
-연봉 협상 때 유리하게 좀 서보려고 산 건데.
그리고,
곧 잠이 든다.
망할.
아무도 없었다
팀장이 며칠간 외근으로 자리를 비우더니,
오늘은 일찍부터 자리에 앉아있다.
늘 인상을 쓰고 있기 때문에.
진짜 기분은 알 수가 없다.
폭풍전야.
-내가 다 긴장되네.
나는 손거울을 조정해서 안대리의 뒷모습을 훔쳐본다.
모니터를 감쌀 수도 있을 만큼 어깨가 말려있다.
조금, 떨고 있는 것도 같고.
"야, 안사라! 너 일로 와봐."
그녀의 어깨가 순간 들썩인다.
사무실 안은 동시에 모두 얼음이 된 듯, 타자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안대리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가지고 팀장의 자리로 걸어간다.
"답 왔어?"
"..."
"또 연락 안 해봤어?"
"..."
"아우씨, 너."
"저, 팀장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내가.
어찌.
다시 앉을까?
"뭐."
-아. 다음 말이. 뭐였더라.
"야, 고과장. 너 따라 나와봐."
팀장이 사무실을 나간다.
-아, 내가 먼저 부르지 않았나?
순간적으로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따라 나와' 뒤에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나는 들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앞서가는 팀장의 뒤를 쫓아나간다.
문을 나서기 직전, 잠깐 안대리 자리를 돌아본다.
축 처진 어깨로 돌아앉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팀장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가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쉼터가 있는 층을 누른다.
한 층이면, 보통 걸어갈 법도 한데.
"야, 쟤 대체 왜 저러냐? 어?"
"..."
"쟤 짤라야 되냐? 어? 너 생각은 어떠냐?"
"그거 파트너가 못하는 거라고 했다던데요."
"아니 파트너가 하나야? 그럼 다른 데를 찾아야지. 못한다고 저렇게 뭉개고만 있으면, 회사 와서 일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어? 쉬운 일만 할 거면 그 자리엔 왜 앉아있어?"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아씨, 안대리말하고 있잖아, 장난해?"
물주먹을 흔든다.
-나는 이런 애 같은 팀장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싫은 것과 무서운 건 또 다른 건가...
"팀장님이 다이렉트로 얘기하지 말고 저 통해서 해주시면 안 돼요?"
"너?"
"그러라고 과장 아닐까요."
팀장은 대답 대신 꼬고 있던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한다.
너도 그냥 그 애를 괴롭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진짜 일이 되게 하고 싶은 거야.
넘어가 쫌.
"아휴, 그래 그럼."
후 하-
막힌 숨이 뻥 뚫린다.
"이제, 들어가시죠."
지이잉-
전화가 울린다.
서림?
"어,"
"과장님, 지금 사라언니, 쓰러져서 병원 갔어."
"뭐어?"
나는 전화를 끊고 앞에 서 있는 팀장을 바라본다.
이런 건가.
싫어지는 감정이라는 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