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헌신 (3)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소원을 빈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이루어지지 않을까?
소원의 주체가 되는 두 사람이
정 반대의 소원을 빌고 있다면,
누구의 소원을 들어줘야 할까?
같은 소원을 비는 사람이 수억 명에 이른다면,
누구의 소원을 먼저,
들어줘야 하는 걸까?
그래도,
소원을 빈다.
출장
공항에서 전시장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싣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정지된 시선으로 창 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본다.
출장...
"고과장, 이번에 터키 가면 잘해야 돼. 알지? 그 협회, 매년 전시도 많이 하잖아."
한 칸 떨어진 파티션 너머로 김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일어나 그의 자리로 간다.
"네...(뭘 잘하면 될까요?)"
"아, 담당자 옆에 딱 좀 붙어있고, 구경도 같이 하고, 술도 하고. 바짝 친해져서 오란말이야. 잘하잖아 그런 거"
"네...(그런 건 네가 잘하지.)"
김과장쪽을 슬쩍 쳐다보며 두 손을 모은다.
-네가 가주면 안 될까. 제발.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흔드는,
넌 동기도 아니야.
"아, 이번에 거기 김차장 말고 상무가 간다던데? 김차장은 아프대. 그러니까 더 신경 써서."
김차장이. 아파?
그의 등 뒤에 업힌 채로 왼쪽! 오른쪽! 앞으로 직진! 하고 있는 이상한 장면이 떠오른다.
"네, 알겠습니다."
김과장과 옥상에서 수다를 떨던 그날에는, 그는 타이밍 좋게 전화를 걸고서도 다른 얘기는 꺼내지 않았었다.
터키 전시회. 업무 이야기 외에는.
-어쨌든, 이번엔 안 만날 수 있으니까...
"이 호텔 맞지?"
기사가 차를 세우고 미터기를 가리킨다.
-내가 본다고 환차를 아니?
달러 백 불짜리 하나를 꺼내어 내민다.
"오, 잔돈 없어? 50불만 주면 되는데"
고개를 흔들어 본다.
멈춰 서서 얘기하고 있는 사이 호텔 벨보이가 다가와 문을 연다.
"너 50불짜리 있어?"
"없는데."
없겠지.
다시 어떻게 하면 좋지. 하는 표정으로 기사를 쳐다본다.
"저기 저 앞에 대기하는 택시에 가서 바꿔올게, 잠깐만 기다려."
그런 수고까지?
나는 서둘러 옆에 두었던 트렁크를 벨보이에게 건네고는 택시에서 내린다.
그리고.
택시는
점점 멀어져 간다.
백 달러만 태우고.
잠깐은 통계적으로 몇 분일까?
조용히 지나가면 내 출장이 아니지.
소식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자욱한 먼지가 눈으로, 코로,
삶의 향취처럼 밀려든다.
한창 공사 중이라, 두서없이 쌓인 자재들로 더욱 좁아진 복도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간다.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천장에서부터 늘어져있는 KOREA 로고를 쫓아 들어가니, 부스 한가운데에 마른 체구의 키가 큰 한국인 한 명이 짝다리를 지고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다고?
검정 아디다스 바람막이에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등에 매고 있는 빨간 백팩.
점차 아래로 내려간 시선에 걸리는 삼선 슬리퍼가 화룡점정이겠다.
-학생인가?
돌아보는 앞모습에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있는 걸 보니.. 앞에서 피부얘긴 하면 안 되는 거다.
"어? 안녕하세요! 고과장님이시죠? 전 여기 참가업체, 박주현입니다."
밝은 목소리에 기운이 빠져있다.
갑의 기운이.
기분이 좋아진다.
"네 안녕하세요."
"아직 부스가 다 안 지어졌네요?"
"네. 여긴 항상 느려요. 좀 기다리셔야 돼요."
"뭐, 상관없어요. 그냥 한번 둘러보려고 온 거니까."
말을 마치고는 바로 공사 중인 부스를 쳐다본다.
나는 서류철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흔들흔들하면서도 그의 옆을 떠나진 않는다.
보통, 이런 곳에 혼자 출장 오는 사람들은,
늘 가벼운 담소를 원하니까.
"터키는 많이 와보셨어요?"
역시나 그는 '처음 만났을 때 하는 질문' 목록 상위에 개시된 질문을 던진다.
"한... 대여섯 번쯤?"
"와, 그럼 잘 아시겠네요. 여기 갈 만한데 있어요? 여기는 외곽 같은데."
"아.. 저도 많이 오긴 했는데... 잘 돌아다니진 않아 가지고요. 헤.. 죄송합니다."
멋쩍게 말한다.
사실을.
"아니, 괜찮아요, 아휴 과장님이 왜 죄송해요."
그가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는,
"그럼 이따 시준이 오면 물어봐야겠네."
하는 혼잣말을...
김시준 차장?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자동차 장식품, 흔들 인형처럼 고개만 까닥거리고 있던 나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박주현을 쳐다본다.
"네? 아. 김시준 차장 아시죠? 여기 협회 담당자.. 사실 저랑 친구거든요.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마세요"
뭐시라?
나한테나 말하지 말지.
"내일 새벽도착으로 온대요."
연펀치.
"네? 아프시다던데"
"아, 좀 괜찮아졌다길래 약 먹고 오랬어요. 저는 여기는 처음이라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헤헤"
"..."
"과장님은 오늘이 제일 바쁘시겠어요"
"네... 그렇죠."
"그럼, 내일 다시 뵐게요, 저도 방에 들어가서 짐 좀 정리하고 다시 나오려고요."
허리를 꾸벅 숙이는 모습에 내가 더 깊이 허리를 숙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집에 가고 싶어.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