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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노래방

90년대 노래와 자란 사람들

by 아는개산책

난 끝내 익숙해지겠지

그저 쉽게 잊고 사는 걸

또 함께 나눈 모든 것도

그만큼의 허전함일 뿐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떤 만남을 준비할까

하지만 기억해 줘

지난 얘기와

이별 후에 비로소 눈 뜬

나의 사랑을


-윤상 '이별의 그늘'



흔들 인형


"고 과장은 업체 만나면 뭐 해?"


막 점심을 마치고 들어와, 배부르고 등 따시니 김 과장이 뜬금없는 말을 던진다.

너는 나 없었으면 이 심심한 사무실을 어떻게 버텼을까.


"술 맥여"


"하하, 어 너는 안 먹고 먹일 거 같아."


키득키득.

웃지만

사실이다.


"중요한 건 술 먹는 자체가 아니야. 그분들이 진짜 원하는 건, 음. 얘기 들어달란 거야."


그래도 강산이 바뀔 만큼 연차가 쌓이다 보니 업체와 대작하며 마신 술이 아마...

엄마가 알면 놀라 까무라 칠 만큼이겠지.


대부분의 소수인원 술자리에선 꼭 과거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술보다는 얘기가 고픈 사람들.


살아온 만큼 하고 싶은 얘기는 쌓여가는데.

자리에 마주 앉아 들어줄 이는 줄어가는 게.

인생인 걸까.


"그럼 넌 안 먹고 그냥 얘기만 들어?"


김 과장이 담배 한 갑을 손에 쥐고 옆으로 다가온다.


"어. 그 자동차 앞에 장식하는 인형들 있잖아. 고개 까닥이는 강아지 인형 같은 거. 딱 그거. 그래도 듣다 보면 재밌는 얘기도 많아."


나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까닥까닥하는 모션까지 취해가며 이야기에 흥을 더한다.


"이야. 언제 그 얘길 다 듣고 있냐. 술도 안 취하고."


"그래서 1차 끝나면 무조건 노래방 가자고 해"


"뭐야, 네가 먼저?"


"어, 그래야 1절에서 끝나."


옆에서 한참 우리 둘을 보던 은희가 사부작사부작 휴대폰을 만지더니 화면 하나를 내게 내민다.


사진 속에는 눈이 반쯤 감긴 채 브이를 그리고 있는 두 취객이 있다.


넥타이를 이마에 둘러 매고 있는 두 여자.

하나는 나, 하나는 세상 얌전한 천생여자 은희.


어느새 자리로 모여든 정 과장, 유수, 태수까지 사진을 보고 빵 웃음을 터트린다.


"와- 맞다. 우리 이랬네."


김 과장이 말하고,

나는 그렇게 추억 속으로 소환된다.



그날의 회식


분명 자주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저녁 회식이라는 말이 오늘도 낯설지가 않다.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양새가,

오늘은 팀회식 정도가 아니라 잘 보이지 않던 임원들도 모두 참석하는 자리.


-이래서 애들 표정이.


웬만한 아파트 거실보다 넓은 방에 들어서면 습한 곰팡이 냄새가 먼저 반기지만, 그보다도 들떠야 할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둔갑되어 사장 자리의 가장 먼 쪽부터 차례차례 낡은 소파가 채워진다.


"네, 오늘 이렇게 모두 모이자고 한 건..."


으로 시작하는 헌사도 아닌 위로의 말도 아닌 마이크를 잡았으니 하는 인사말이 방 안을 울린다.

일부 직원들은 벌써부터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사장 발언이 끝나자마자 그의 애창곡이 일 번으로 띄어진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시를 대하는 표정으로 읊조려가던 내레이션이 끝나고 모두가 아는 첫 소절이 시작되는 순간,

키가 크고 호리 한 언니들 둘셋이 차례로 들어오더니 임원 몇의 옆으로 가 앉는다.


나를 비롯 여직원 남직원 가릴 것 없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거 지금 무슨 그림?


실장님을 쳐다보지만, 그냥 그런 줄 알라는 듯이 눈만 깜박이며 신호를 보내는데,

당최 알 수가 있나.

이것이 으른들의 세계인가?


직급이 낮으면.

생각도 없다고 여기고 싶은 건지도.


사장의 노래가 끝나고 넘버 투, 쓰리 순서대로 한 곡조씩 뽑아내자 실장이 노래방책을 막내에게 넘긴다.


막내는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대리를 본다.

대리는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과장을 본다.

눈빛만 돌고 돈다.


거기다 왠 예쁜 언니들까지 앉아서 노래감상을 하고 있으니, 소주를 짝으로 마셨대도 술이 다 깰 판이다.


하는 수 없이 김 과장 옆으로 가서 앉는다.


"야, 넥타이 풀러"


마냥 신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던 김 과장이 놀라서 쳐다본다.


"뭐? 왜에"

"노래 부르게."

"넥타이는 왜?"

"이마에 둘르려고 하고 다니는 거잖아. 싫으면 나한테 둘러줘"


나도 영업사원이다.

다만, 오늘의 내 영업은 밖이 아닌, 안이다.


번호를 누른다.

먼저,


'예쁜 여우'부터.


남자들은 믿지 마라

모두 늑대다


임원들 한 명 한 명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정성스레 첫곡을 부른다. 그러면서 김 과장에게 빨리 예약하라는 무언의 눈빛을 던진다.

눈치로 읽은 김 과장이 번호를 예약한다.


'낭만 고양이'.


나는 나응만 고양이 이이 이


조금씩 긴장감이 풀려간다.

굳어있던 막내들도 맥주를 좀 더 들이켜고 한치로 배를 채우더니 한 명 한 명 예약을 시작한다.


90년대 노래는,

그 시대를 산, 우리들 이야기였다.


쌍으로 앉아 박수만 치던 임원들은 시작한 지 20분도 안되었는데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를 턴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치레라도 말리지 않는다.


이젠,

흥으로 지붕 뚫고 하이킥이다.

소파 위를 뛰어다니고, 따라 할 수 있게 만든 춤도 삐그덕 흉내를 낸다.


날길 바라는 병아리도, 둥지에 떨어진 뻐꾸기도, 붉게 타오르는 저 노을도, 모두.


내 밑으로는 모두 넥타이를 이마에 곱게 묶고.


맨발의 청춘들이 부르는 버스 안에서, 소찬휘, 백지영, 터보, 코요테까지 찾다 보면 마이크를 넘길 틈이 없는데, 자꾸 내가 예약한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부르고 있다.


부르고 계속 부르고

주인아저씨는 시간을 넣고 또 넣고.


어제도 힘들었는데,

내일도 힘들겠지.

그러니 오늘은 부른다.


상사 눈치 안 보고.

두드릴 계산기도 없이,

목이 터져라 부른다.

우리네 이야기들을.



지나버린 건


"맞아, 난 너 진짜 미친 줄."


김 과장이 나를 보며 말하고,


"같이 미칠 줄 아는 네가, 챔피언."


나도 김 과장을 향해 손 권총을 날리며 말한다.


"그땐, 그래도 재미있었는데. 멤버도 그렇고. 많이 바뀌었네"


"계속 바뀌지. 아마도 그땐, 우리도. 그때 밖에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미칠 수 있었."


"음..."


나이가 들어갈수록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차려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


그때의 주정뱅이들.

마지막을 015B의 이젠 안녕으로 끝내자며 부르다가도,

안재욱의 친구가 진짜 마지막이라며 부르다가도,


그날의 마지막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떤 만남을 준비할까

하지만 기억해 줘

지난 얘기와

이별 후에 비로소 눈 뜬

나의 사랑을


영원한 오빠, 윤상이었다.


덧없이 흘러간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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