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9월이 되었다. 본래라면 처서를 기점으로 기온이 조금씩 떨어졌어야 할 시기다. 하지만 무더위는 가시질 않고, 뙤약볕 아래 드러난 살은 여전히 태양 빛을 이기지 못하고 익어만 간다. 벼가 익어야 할 시기에 애먼 피부가 익는다.
날씨를 대강 예측하고 챙겨 온 옷가지는 이번에도 실패다. 두께감이 있는 널찍한 소매의 반팔티와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얇은 소재의 긴바지.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쪄 죽기 딱 좋은 패션이다. 하지만 최신 유행처럼 짧은 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다면 아마 천이 닿는 자리에 선명한 경계선을 남기며 살이 타버렸을 것이다. 내게는 곧 딜레마가 찾아온다. 짧은 소매를 입으면 강한 햇빛에 바로 노출된 피부가 빨갛게 달궈질 테고, 긴 소매를 입으면 바람 없는 날 몸을 가두어 놓는 '땀 공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하루의 쾌적함을 결정하는 오전, 등교 패션을 결정하기 위해 옷장을 열어볼 때마다 고민이 늘어만 간다. 잘못 고른 패션은 에어컨 바람 아래 추위에 떨게 하거나 바깥날씨에 마르게 하거나 둘 중 하나로 직결된다.선크림을 씻어내기 귀찮다는 이유로 절대 민낯을 고수하는 습관도 고민에 박차를 가한다.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이라면 그냥 선크림을 꼬박꼬박 바르는 게 맞지 않겠냐는 물음이 꼬박꼬박 들어오지만, 이 지점에 대한 나의 입장은 언제나 확고하다.
결국 선택하는 것은 긴바지. 애당초 짧은 상의란 건 내 옷장에 있을 리 없고, 결국 바지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햇빛이 전혀 통하지 않을 만큼 넉넉한 길이의 바지를 입고 등교 버스를 기다린다. 오전의 햇살을 완벽히 막아주는 모습을 보며 만족감을 느낀다. 강의가 끝나고 한낮의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기나긴 통학용 단일 노선 배차간격을 견디고 있자면 약간의 후회가 찾아오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옷 속으로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버스에 오르면 머잖아 시원한 그늘과 에어컨이 상을 내려줄 것이다. 짧은 천국을 맛본 뒤 10여 분간 느리게 걸으면, 마음껏 에어컨을 틀 수 있는 기숙사가 나를 맞이한다. 나는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뜨거운 태양을 피해 숨어들어간다.
타오르는 햇빛 아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9월이다. 날씨는 잠잠해질 줄 모르고 여전히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뜨겁진 않았는데, 환경 문제가 절실하게 피부로 와닿는다. 이젠 정말로 여름이 한 달 더 늘어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본디 끝물이었어야 할 8월은 여전히 한여름, 이젠 9월마저 작열의 계절로 불리게 될 듯하다. 더위를 조금이라도 해소하려 4시간씩 에어컨을 틀고 있으면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든다. 설정 온도는 언제나 27도, 그마저도 습기가 가시고 냉기가 돌면 끄고 있음에도 내 주변 공기는 해가 갈수록 어색하리만치 변해 간다. 내가 사회에 나갈 때즈음에는 도대체 어떤 계절을 보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저 있다. 저녁으로 먹은 컵라면, 다 쓰고 부러뜨린 나무젓가락을 보면서 늘 그런 고민을 한다. 일종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가벼운 외출에 동행하는 옷 한 벌에도 갖은 핑계를 대 가며 진지한 고찰이 함께하듯이, 살아가는 방식에 조금이라도 더 신중해지지 않으면 앞으로의 여름은 더 길고, 더 혹독해질 것이다. 만악의 근원이라는 건 없다. 한 기업, 혹은 한 사람의 실수만 지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부 한 사람 한 사람의 부주의와 무관심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젠 정말 '나 하나쯤이야⋯' 같은 생각을 버릴 때가 되었다.
실은, 환경이란 개개인의 힘만으론 바꾸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것은 현실이 맞다. 하지만 생각하는 개인들이 모여 사회 풍조를 이루면, 기업도 자연히 그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다. 일찍이 타일러 씨가 우리는 이제 다음 세대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며, 자기 자신의 생존부터 걱정해야 하는 세대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당장 3년, 5년, 10년 후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앞으로 더더욱 후회하지 않도록 바짝 긴장해야 하고, 생각하고, 또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못한 미래의 우리가 후회하게 될 일은 결코 아침에 옷장에서 꺼낸 바지의 길이만큼 얄팍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그러니 오늘은 나부터, 내일은 내 가족부터. 아주 느린 속도로 바뀔 세상을 생각하며 한 걸음을 시작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