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 4년제 대학 편입 합격 통지를 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괜히 했다.'였다.
스무 살이 된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인 대학은 서울의 한 전문대학이었다. 그리 좋지 못한 성적으로 어찌어찌 들어간 곳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몰아치는 집안사와 질풍노도의 사춘기, 파도처럼 밀려든 우울증으로 학업을 포기했다. 4인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할머니의 치매, 중학교 졸업식 날 새벽 날벼락처럼 찾아온 할아버지의 부고와 함께 나의 자신감도 불 꺼진 재가 되었다.
내 10대 후반은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골목길을 홀로 걸어야만 했던 시절이다. 중증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집에서 직접 모시면서 집안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고,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고모 댁에 가는 날에만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쌓인 스트레스가 서로에게 표출되던 시기. 해소할 길 없는 답답함들이 폭발해 재앙처럼 찾아온 난독, 자연히 따라갈 수 없게 된 진도, 완전히 방전된 정신력,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 남들은 과목별로 등록한다는 학원 하나 다니는 것도 우리 집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잘 산다고 말할 수 없는 집이었다. 그런 와중에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2년을 통째로 들여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야말로 허상 같은 꿈이었다. 글자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되니 성적은 턱없이 부족했고, 큰소리치는 것에 비해 실력도 초라했다. 집중력 저하와 수면장애가 찾아와 학교에서는 잠만 잤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림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타고나길 몸도 약해 고등학교 3년 내내 '건강을 챙긴다'는 핑계를 댔다. 매일 자퇴를 생각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달에 한두 번씩 병결이나 조퇴서를 낼 뿐이다. 결과적으로 출석만 대충 하는 신세가 된 학생이 제 힘으로 입시를 제대로 준비할 리 만무했다.
간혹 어려운 환경을 잘 이겨내고 좋은 학교에 진학한 사례가 '미담'이 되어 전설처럼 내려오지만, 전설은 전설이다. 실제로 보기 드물기 때문에 '미담'이 될 수 있다. 좋은 입시 결과를 위해 학생들을 채찍질해야 하는 고등학교 교사들은 언제나 자신이 언젠가 가르쳤던 모 학생의 '미담'을 꺼내들어 아이들을 훈계한다. 너희도 그 미담의 주인공처럼 열심히 해서 또 다른 미담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현실에서 몸부림치다 못해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시선으론 미담이 미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 학생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어떻게 알지? 입시 결과만 좋으면 다 '성공한 선배'인가? 그 학생은 자기 이야기가 미담이라고 생각할까? 자신의 고생담이 후배들을 닦달하는 논리가 되기를 바랐을까? 비슷한 환경에 있어도 미담의 주인공이 될 재목이 아니었던 나는 우울 증세에 시달려 교과서의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처음부터 공부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려는 시도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난독증이라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등교만 하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마가 덮쳐 왔다. 수면부족이라고 여겼다. 이쯤 잤으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잠이 쏟아졌다.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며 자리에만 앉으면 잠을 잤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3교시가 죄다 지나 있었던 적도 있었다. 뭘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고 싶지 않았는데 잠이 왔다. 커피 따위도 소용이 없었다. 애당초 카페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이라 커피만 마셨다 하면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견디기 어려운 무력감을 털어놓을 곳도 없었고, 내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몸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현실도피를 위해 찾은 SNS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상한 사람들과 불필요한 자극이 더 많은 곳이다. 갈수록 버릇이 나빠지고 자존감도 떨어졌다. 온라인에서 잘못 엮인 사람에게 시달리다 도피성 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나빠진 말버릇이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가족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까지는 지옥을 기어야 했다.
고등학생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 여기는 지금도 3학년 이전으로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물지 못하는 상처가 남았고,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가장 아름답게 빛나야 할 시기를 허송세월로 보냈다는 것이 뼈에 사무칠 때도 있다. 남들은 문자 그대로의 청춘을 보냈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난 왜 더 슬기롭게 버텨내지 못했을까. 답을 얻을 수 없는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진저리를 치는 고등학교 3학년, 입시 경쟁의 정점을 찍는 그 해는 내게 회복의 시간이었다. 학생 관리에 대한 신념이 있는 노련한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만의 법도대로 엄격하게 관리된 학급 분위기, 학생들을 긴장하게 하는 선생님의 카리스마. 아이들이 정말 착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 덕에 우리 반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 모두가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옆 자리 친구를 챙겼다. 나 혼자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가 없는 반이었다. 모두가 서로를 격려하는 분위기는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좋아하는 선생님, 좋은 급우들, 그나마 내 흥미를 끌었던 과목들. 나의 고등학교 3학년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담임 선생님이 있다. 이전해 선생님들이라고 좋은 분들이 아니었다는 건 아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셨다. 잘 되지 않았을 뿐이다. 3학년이 되어 첫 상담을 받은 날. 이 성적으론 대학 진학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던 내게 가능성을 일깨워 주신 것이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물론 힘든 순간도 있었다. 찍은 것도 아니고, 손으로 풀이까지 한 수학 시험 성적표에 0점이 찍히는 황당무계한 사건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관심은 내가 어떻게든 사회에 발을 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1년간 점점 좋아졌다. 현실적인 문제를 스스로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책임지는 법도 배웠다. 4년제 적성고사 원서를 전부 땅에 버리고 수능 없이 전문대학에 지원했다. 그림을 그만두고 어학 계열로 과를 바꿨다. 후회는 없었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고민했다. 삼 년 내내 내외하던 공부를 제대로 해 보겠다는 결심을 처음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앞으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의 처음으로 어두운 골목길에서 빛을 찾았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 모든 것이 새로웠다. 시대마저 새로웠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코로나가 터졌다. 비운의 20학번이다.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학교에 다니고는 있지만 학교 캠퍼스에 갈 일은 없었고, 교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인사드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게 기회인 사람도 있다. 애당초 대학생활에 로망이 없었으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밖에 나가는 걸 제일 싫어하는 극한의 내향형인 나에게 집에서 강의를 들어도 된다는 사실은 아주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대면 수업의 질이 대면 수업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차피 공부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하는 게 대학이다. 환경이야 어쨌든 좋아하는 공부를 하게 된 나로서는 듣기 편한 형태가 된 게 더 나았다. 집중력과 주의력이 심하게 저하되어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통학 시간 때문에 잠을 줄여 가뜩이나 없는 집중력을 더 떨어뜨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정말 큰 메리트였다. 내가 편하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자 이전의 내가 상상하지 못할 발전을 이루었다. 대놓고 딴짓을 하는 학생들 사이 꿋꿋하게 캠을 켜고 홀로 교수님의 질문에 답했다. 중요한 사실을 두 번 체크하는 버릇을 들이다 과 대표로 스카우트되었다. 나는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는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으레 대학에 품는 로망과는 정반대의 생활이다. 애인은 고사하고 친구도 고등학교 때까지가 전부다. 대외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에 넘치는 교수님들의 사랑과 상상도 못 할 성적을 받았다. 학문에 대한 나의 숨겨진 애정이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보았다. 처음에는 나 스스로도 얼떨떨했다. 열심히 한 만큼의 보상이 돌아온 것이 뿌듯했고, 이런 성적을 받아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지 오래라 공부는 내 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내가 알던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전문대였지만 교수님들은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으셨다. 언제나 좋은 학습 환경을 위해 발로 뛰시는 분들이셨다. 1년의 휴학 기간을 거쳐 돌아간 학교에서도 교수님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뒤늦게 딱 한 과목 들었을 뿐인 교수님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수님들의 칭찬은 내게 부담을 주는 대신 더 열심히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었던 진로를 공부로 완전히 굳힌 것도 어쩌면 교수님들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이전 대학의 교수님들은 종종 내게 연락을 주신다. 그 애정 어린 연락들이 내게는 여전히 공부를 계속할 원동력이 된다.
휴학을 포함한 3년의 전문대학 생활이 끝나 갈 즈음 편입을 결심했다. 대학원 진학은 진작부터 예정하고 있었고, 학과 교수님들과의 상담도 여러 번 거쳤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4년제 학사 학위가 필요했다. 어문 계열 학과였기에 처음에는 유학을 계획했지만, 코로나와 기타 사유로 무산되었다. 2학년이 되던 해에는 전공심화 학사 학위 야간학부 개설도 논의되었지만, 인원 미달로 이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내게 남은 선택지는 국내 편입. 편입을 결심한 시점은 2학년 2학기였다. 시험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재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니며 강제로 루틴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1년간의 휴학 기간이라는 선례도 있었다. 1년을 버리느니 현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렇게 택한 것이 2년간 열심히 닦아 놓은 학점을 이용하는 것. 지금의 학교를 다니게 된 계기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는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닌 것은 당연하고, 생전 처음 가 보는 타지다. 본가에서 통학할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에 그곳에 몸 누일 곳을 찾아야 했다. 자취를 할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으므로 자연히 기숙사행이 결정되었다. 그렇게 내 첫 기숙사, 첫 타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험난했다. 학교는 당장 입소를 준비해야 할 시기나 되어서야 합격자 명단을 내어놓았다. 교내 기숙사임에도 서울 자취방 월세만큼 비싼 비용은 엄마를 경악하게 했다. 애당초 그 값을 주고도 기숙사에 붙기 어렵다는 게 더 문제였다. 어찌어찌 다른 기숙사를 찾고 나서도 문제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마련하는 것도 문제, 개강 전에 기숙사 짐을 싸서 보내는 것도 문제, 그 무거운 걸 혼자 방에 들여놓고 정리하는 것도 문제, 동네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고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문제. 제한된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 가며 내 정신건강과 허기를 둘 다 해결하는 것도 아주 큰 문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강신청까지 편입생들에게 지나친 난이도를 요구했다. 재학생들이 자리를 모두 채우고 나서야 편입생 합격 발표가 나와버린 탓이다. 편입생은 2차 수강신청 기간에 한 줌 남은 자리를 두고 정정을 노리는 재학생들과도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졸업을 위해 채워야 하는 학점도 많은 데다 휴학도 불가능한데 대체 어쩌라는 걸까. 집에서 당장 해결해 줄 수 없었던 학비와 기숙사비는 내가 4년간 모은 적금을 깨서 해결했다. 온라인 서버시계를 다섯 개씩 켜 놓고 수강신청에 매달렸다. 어떻게든 해낸 것들은 미묘하게 2%씩 부족했다. 이불은 챙겼는데 베개가 없질 않나, 휴대폰 충전기가 없질 않나, 먹을 건 없는데 기숙사에 식당 하나 없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았다.
지원을 넣을 때부터 학교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타지 생활을 각오한다는 건 원래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정도의 고난이 닥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기차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해 편도 4시간씩 지하철을 타고 편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러 갔을 때도 시원함보다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모르는 길들이 무서웠다. 학교로 오는 단일 노선인 주제에 버스 배차 간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합격과 동시에 알아야 할 것들을 급하게 찾아보며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내내, 일찍이 합격의 기쁨은 사라지고 내 안에서는 한 가지 생각만이 들어차 있었다. '그냥 사이버대학이나 갈 것을, 이딴 짓은 괜히 한다고 했다.'
그렇게 내 첫 편입의 기억은 후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