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뭘 느꼈냐면요 !
*로 시작하는 문장은 책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제가 특히 인상깊게 생각한 문장들을 골라보았습니다.
*나도 나의 관심이 나에게서 타자로 옮겨갈 때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타자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며, 대신 우리라는 신기한 집합이 탄생한다.
• 나는 어떤 면에서 외향형일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너무 싫다가도 사람 덕에 기분이 너무 좋아지기도 하는데, 왜 내가 이렇게 ‘사람’에 신경을 쓰는지 스스로 근거를 대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던 중 책을 읽다가 이 문장을 보게 되었고, 어쩌면 나의 외향성에 대한 이유를 이 문장을 차용해서 설명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고, 그 사람과 내가 공감을 하는 순간 우리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 ‘우리’라는 개념에서 삶이 시작된다는 나의 믿음. 그게 나의 바깥지향적인 삶을 설명해준다.
*그 중에서도 소가 배출하는 가스가 가장 심각하고, 양과 돼지가 그 뒤를 잇는다.
• 소, 양, 돼지 다 내가 좋아한다. 그래서 너무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맛있다는 단순한 감상 하나에 숨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는가. 조금은 줄이자. 모순적이더라도 하나씩 해나가다보면, 그 성취감이 나를, 지구를 살려줄 것이다.
*신체는 건강해도 전혀 건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많다. 헬스장에는 그런 사람이 많다. 건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개념이다. 혼동하면 안된다. 건강함과 건전함은 다르다. 건강하지만 건전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 사람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각자 있을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눈빛’이다. 속칭 ‘동태눈깔’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괜히 쎄하고 가까이 하고싶지 않다. 눈빛이 건전하고 또랑또랑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이 문장이 너무나 공감됐다. 상기 문장처럼 본인 몸을 키우는 것에는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과시하지만, 그저 채식을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비난과 멸시와 위선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이 주변에도 있다(아마도 타성에 젖어 시대를 뒤흔드는 pc 자체를 불편해하는 거겠지 ). 그들의 신체는 건강할지 모르겠으나, 눈빛은 죄다 맛이 가있고, 그들의 불건전함을 주변인들이 쉽게 알아챈다.
*나는 나름의 절도가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최소한으로 지키고자 하는 선이 있어야 때때로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든 윤리는 최소한의 윤리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는 하지 않겠어. 라는 자세이다. 그 최소한이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
• 요즘 시대에 절도라는 것은 딱히 미덕이 아닌 듯하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맛있는 건 많이 먹을수록 좋지, 쾌락은 추구할수록 좋지 등등 절도를 지키는 사람들이 샌님이 되고 멍청이가 되는 세상이다. 조선시대 경주 최부잣집에서는 곳간에 쌀이 10000석을 넘으면 더 이상 축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일화는 대한민국 천민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나에게 꽤 깊은 울림을 준다. 나름의 절도-최소한으로 지키고자 하는 선-최소한의 윤리-적어도 이것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자세. 나는 나만의 이런 걸 가지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울렁거리며 쏟아져나오는 세상일지라도 말이다.
*완벽한 비건은 없다는 생각으로 겸손하게 접근해야 한다.
• 필자가 얼마나 비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비건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그저 낯설고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시선을 받아왔을까. 또한 그 시선들 중에는 그들을 깎아내리려고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뜨리며 공격적인 눈빛을 보내는 시선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시선들을 쳐내기 위해서 필자는 아마 완벽한 비건은 없고, 본인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미 비건을 생각했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완벽한 생각이라는 것을 잡식 인간은 인정해야할 것이며, 언제나 존경해야한다.
*그래서 비건에게만 모든 부담을 지우고 완벽함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진정한 변화를 이뤄낼 수 없다.
• 소수자들에게 모든 부담을 지우고 완벽함을 요구하는 건 다수자들의 특징인 것일까? 아마 완벽하지 않은 소수자는 존중해줄 수 없다는 논의가 가장 편하기 때문에 그런 걸 것이다. 이는 비단 비건의 문제가 아니다. 페미니즘을 생각해보라. 애꿎은 남자를 공격하고 성격적으로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만 있어도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갖추어서는 안될 소양같은 것이 되었다. 다 완벽하지 않은 네 탓이라고 손가락질한다면, 진짜 우리나라가 정반합을 이뤄낼 수는 있을까?
*무슨 주의자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말로만 떠들어도 쉽게 탄로 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의 혜택을 한껏 받으면서 살아도 티가 안난다. 페미니스트도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으면 이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힘들다.
• 말로만 신념을 지키면서 사는 건 쉽다. 행동했으면서도 그걸 과시하지 않는 신념은 그만큼 어렵고. 언론이 발달하고 sns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쉽게 ‘주둥이 신념’에 집중하게 된다. 자기 pr 시대이기에 본인의 신념을 여기저기 말할 수 있다고도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다. 본인의 신념은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해 바뀔 수도 있는건데, 바뀔 때마다 여기저기 공지할 것도 아닐텐데 항상 그렇게 본인의 신념을 광고하는건 웃기는 일이다. (내가 sns 문화에 어느정도는 부정적인 편이라서 단어들이 셀 수 있다.) 아무튼 개개인이 공인들의 신념에 대해 옥석을 가려내는 기술이 필요한 시대이다. 또한 나 스스로의 신념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이 필요한 시대이다.
*물론 세간의 조롱을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비건의 의미를 생각하면 육식주의의 욕망, 미학, 입맛을 그대로 고수한 채 내용물의 재료만 바꾸는 건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다. 보통은 내용은 똑같고 간판만 바꿔 다는데, 이 경우엔 거꾸로다. 내용은 달라졌는데 간판이 똑같은 격이다. 이 역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적어도 나에게 비건의 이상은 감각과 감수성의 혁명적 전환이다. 육식주의와 확실히 구분되는, 발상부터 다른 비건적 창조성을 지향하길 바라는 건 무리한 요구일까 ?
• 내가 가끔 비건에 대해 조금은 묘하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콩고기 스테이크와 같은 모순적인 이름을 가진 채식 식단은 확실히 누군가에겐 비웃음을 살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것들이 가치관에 따라 비건 내에서도 충분히 의견이 갈릴 수 있는 주제라는 것을 알고나니 의문이 어느정도는 사라졌다. 누군가에겐 육식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채식이 온세상에 채식을 도입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의견이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필자의 상기 의견처럼 무언가를 모방하지 않는 진정한 채식으로의 지향을 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관된 합의를 이루어내기는 어려울테지만, 모두 채식에 대한 건전한 의견들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자 운동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도덕적 결벽증도 눈에 띈다. 말 한마디의 정치적 올바름, 실수 하나를 꼬치꼬치 따지며 꼬투리를 잡기도 한다.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하지만, 내 생각에는 완벽주의로 가기보다는 비건 친화적인 공동체를 최대한 확장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 이 도덕적 결벽증이라는 것이 현대 사회에 퍼져있는 질병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나 또한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문제는 개개인이 느끼는 도덕적 결벽증의 포인트가 다 달라서, 이것에 대해 하나하나 반응하는 순간 정신병에 걸리는건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왜 이 사회에 도덕적 결벽증이 만연하게 된 것일까. 내가 느끼는 원인은 ‘인구의 과밀화와 지나친 사회접촉’ 때문이다. 우리 몸을 떠올려보면, 알레르기(과민반응)가 일어나는 이유도 어떤 반응에 대해 면역세포가 과하게 반응해서 발생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어떤 자극에 대해 적당히 반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지구 인구는 80억을 넘어섰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저출산사회라고 해도 나와 같이 태어나고 죽을 예정인 90년대생 한국인들은 드글드글 넘쳐난다. 그런 사회는 사회적 알레르기를 달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덕적 결벽증을 나도 가지고 있고, 그것 때문에 많이 괴로워도 하고 있다. 내가 요즘 이것을 대처하는 방식은 ‘모순’이다. 나 스스로 모순적인 인간임을 자처하고 인정한다. 또한 ‘공동체’다.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 인원이 행하는 행동들이 나의 도덕적 결벽증과 맞지 않을 때 이를 철저하게 재고해본 뒤 과감하게 수용하는 것. 이것이 내가 선택한 처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