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꺼꿀이 Jan 10. 2022

타인 관찰일지

-고급 호텔의 한 수영장에서

 고급 호텔의 한 수영장에서 썬베드에 누워있던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수영장에서 저마다의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나 또한 나만의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 즐거움 뒤에 숨어있는 여러가지 나만의 개인적인 사건들은 다 뒤로 하고 말이다. 멍하니 수영장의 물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의 수평선과, 하늘 위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구름들을 쳐다보다가 나는 그 곳에 있던 가족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10분만 같이 있어도 녹초가 되어버릴 것 같은 초등학교 고학년 남자아이. 그런 오빠 밑에서 최대한 큰 데시벨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켜야만 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아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미 에너지는 소모될 대로 되어버린 중년의 엄마. 그 옆의 썬베드에 누워있던 나는 듣고 싶지 않아도, 보고 싶지 않아도 그 가족에 대해 관찰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는 물놀이를 싫어하는 듯 했다. 아니, 싫어한다. 자녀들의 지속적인 물놀이 권유에도 불구하고 물에 들어갈 것 같은 제스처도 안 할 만큼 단호했으니까. 엄마와 자녀들의 기싸움이랄까? 뭐 그러한 것은 어마어마했다. 자녀들은 엄마가 거절하면 할수록 더욱더 엄마에게 물놀이를 하러 들어오라고 떼를 썼다. 심지어 썬베드에 있는 엄마에게 물을 뿌려가며 본인들과 놀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징계를 했고 그 옆에 썬베드에 누워있던 내가 2차 피해를 볼 정도였다. 엄마는 자녀들이 떼를 쓰면 쓸수록, 그럴거면 방으로 들어가버리겠다는 보기에 좋지 않고 실제로 자녀들에게 씨알도 안먹히는 양육방식을 보여주며 아이들을 협박했다. 내 어린시절이 생각이 나 트라우마가 떠올랐을 정도였다.

 딸아이는 엄마에게 무언가를 원하는지는 모르겠는 창의적인 생떼를 썼다. 마스크를 물에 젖지 않게 전달해달라는 둥, 구명조끼의 버튼을 채워달라는 둥, 이렇게 놀아주지 않을거면 아빠를 불러달라는 둥… 딸아이는 엄마가 무시를 하면 할수록 일부러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면 남에게 뻔뻔하게 민폐를 끼칠만큼의 담대함은 없어보이는 엄마는 결국엔 딸과의 실랑이에 합류하게 되는, 뭐 그런 패턴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귀여운 악마가 확실하다.

 아들래미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저 혼자서도 잘 놀다가 동생을 괴롭혀 결국 소리지르게 만들고, 끝없이 엄마가 수영장으로 들어와 같이 놀아달라는 기싸움의 물꼬를 트는 것도 아들이었다. 내가 대신 놀아줌으로써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부탁이었다.

 내가 감히 그래도 될지 모르지만, 그냥 전반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예전에 20대 초반만 해도 내 옆에 이런 가족이 누우면 자리를 그냥 옮겨버렸다. 시끄럽고 짜증나고 성가셨기 때문이다. 근데 20대 후반이 된 지금, 모든 입장이 온전히 이해가 갈 것 같아서 안타깝고 짠했다.

 아빠는 어떤 사연이 있어 수영장에 오지 않은 것인지 모르지만, 확실히 엄마는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언급을 더 이상 하려하지 않았다. 이혼을 했을거라고 추측하는 건 너무 클리셰스러운 생각이지만, 그 정도 추측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아빠는 그 곳에 속해있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의 빈자리를 메울 생각도 없어보였고, 그저 지쳐보였다. 핸드폰만 하는 엄마를 나야 상당히 이해한다지만, 어리고 철없고 미성숙한 그녀의 자녀들도 이해해줄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럴거면 나를 낳지 말았어야지-라는 말이 잔인해보일지라도 자녀 입장에선 서운한 마음에 수없이 되뇌이게 되는 말이란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내가 만난 그 두 남매는 전두엽에 손상이 와서 화를 전혀 낼 수 없는 사람이 키워야만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에너지와 템퍼가 매우 강해보였다. 사실 그 남매가 첨벙첨벙 놀고 있던 수영장 안에서 혼자 노는 아이들은 없었다. 모두가 엄마와, 아빠와, 혹은 엄마아빠와 수영을 하고 있었다. 핸드폰만 보고 있던 엄마는 못보았겠지만 나는 그 남매들이 왜 그렇게 엄마를 찾는지도 알 것 같았다. 좀 민망하기도 했을거고, 엄마랑 진짜로 놀고싶기도 했을거고, 나도 엄마 있는데 우리 엄마는 왜 짜증나게 안 놀아주는지 답답하기도 했을거다. 엄마에겐 물놀이에 집중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아빠와 사이가 안좋았을 수도 있고, 핸드폰 안에서 공인인증서든 금융인증서든 그 짜증나는 인증서들과 씨름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물놀이 후에 아이들과 어디 맛집을 가야할지 찾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녀들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경기장 밖에서 코치 마냥 뽀송뽀송한 상태로 있던 나는, 맹렬하게 땀을 흘리며 몇 십 년동안 경기를 뛰어야하는 그 선수들을 바라보며 그냥 이런 건방진 생각을 했다. 그들은 언제쯤 진심어린 소통을 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아직도 가족들과의 진심어린 소통이 쉽지만은 않기에 더욱 그들의 소통의 확률이 궁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90년대생의 지극히 사적인 고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