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없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이런 핑곗거리를 찾을 시간에 그것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날마다 전철 안에서 책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될 수가 없다!
내가 30대였을 때다.
평촌에서 뱅뱅사거리에 있는 본사로 출•퇴근을 했었다. 회사까지 전철을 타고 다니면 걷는 것까지 포함해서 약 1시간이, 버스를 타면 25분이 걸린다. 회사가 근로기준법에 따라 작성한 취업규칙상 출근시간이 08:00이다. 그래서, 7시 전에 집에서 나가야 한다.
하루는 그분이 회사 건너편에 있는 친정에 다녀와 묻는다.
“버스가 회사 정문에 서던데, 왜 사서 고생을 하시나?”
나는 바로 대답한다.
“전철을 타면 하루 최소 80분(40분*2회)을 책을 읽지. 버스는 멀미 때문에 뭘 듣거나 자거나 빼고는 아무것도 못해.
그래서 돈을 주고서라도 고생을 사려고.”
내 성격을 잘 아는 분이라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하듯 말을 돌린다.
요즘은 여의도로 출근하는데 역시 그 정도 걸린다.
2002년 4월 처음 본사에서 근무하며 21년 이상 전철을 독서실로 여기며 지내왔다.
하루, 80분을 21년 동안 꾸준히 책을 읽었다. 술 먹은 다음날도 예외 없다. 그 시간을 환산해 보니 약 10,253시간이나 된다. 계산의 편의를 위해 쉬는 날도 모두 평일로 가정하여 시간을 일괄 적용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읽기 능력이 조금 향상되었다.
지하철에서 영어원서를 보다 보니 재미있는 일들도 꽤 있다. 날마다 같은 칸에서 앉거나 서서 글을 읽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은 서로가 잘 몰라도 얼굴은 대충 안다. 그래서, 누가 어디서 내릴지 잘 아는 것 같다. 물론, 나만 빼고.
나는 안면인식 장애가 있는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 동네에 사는 그분의 친구들도 여러 번 봤을 터인데, 길거리에서 만나도 그냥 씩 지나간다. 그들의 제보로 나중에 또 한소리 듣는다. 아는 척 안 하고 지나갔다고.
또 어떤 날은 서서 가는데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 꼰대가 내 눈치를 보더니 자꾸 오른쪽으로 밀친다. 왜 이러나 했는데 다음역에 내릴 여자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양이다. 앉은 사람이 일어나기도 전에 앉으려 하더니 잽싸게 앉는다. 그 여자가 거기 내리는 줄 미리 알고 나를 옆으로 민 것이다. 사실, 내가 앉은 사람들 사이에 양다리를 거치고 서 있긴 했다.
어쨌든 그 꼰대가 너무 없어 보인다. 참고로, 우리 집 가훈이 ‘없이 살지 말자!“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전철에 자리가 놔도 서두르지 않는다. 내릴 사람이 모두 다 내리면 탄다. 가훈을 지키고 싶어서다.
장애라기보다는 책을 보거나 딴생각으로 사람들 얼굴을 볼 겨를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남들이 눈치껏 다음역에 내릴 사람 앞에 미리 서 있다가 자리 교대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못한다.
오늘 같은 날은 굳이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자리에 않더라도 노안이 와서 안경의 초점을 맞추기도 힘들다. 또 조명과 거리가 멀어 어둑해져 깨알 같은 글씨가 잘 안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날은 재수 없다 여기고 브런치에 올릴 글이나 쓰며 간다.
Edward Gibbon의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읽을 때다.
이 책은 하드 커버로 총 6권인데 1 권당 약 500페이지 분량이다. 딱 도시락 크기 만하다.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노란색 형광펜을 칠하며 읽은 티를 내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늘 왼손엔 책을 오른손엔 형광펜을 든다.
같은 전철 칸 맞은편에서 나를 유심히 지켜본 또 다른 독서광(A)이 있었다.
평촌에서 여의도로 출근하는 회사의 동료(B. C, D. E)는 여럿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가 있는 곳을 함께 하지 않는다. 서로의 스타일을 잘 아는지라 같은 역에서 만나도 인사만 건네고 루틴을 위하여 모두 각자의 칸으로 간다. (어쩌면 재미없는 나를 피할지도 모른다.)
철칙이다!
그런데 내 앞에 있던 A는 회사의 다른 부서 동료인데 서로가 얼굴을 모른다. (A는 B와 C를 잘 안다. 자주 만나 스크린 골프도 친다.)
서로 안면이 없기 때문에 나와 A는 같은 칸에서 각자의 일을 보며 움직인다.
어느 날 환승역인 동작에서 내려 B와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다가 A를 만난다. A와 B가 너무 친하게 얘기하길래 나는 서너 발짝 뒤로 물러 선다. 뒤에서 보니 A가 놀라면서 B에게 ‘나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눈치다. 같은 부서에 근무해 봐서 잘 안다고 대답한 것 같다. 나를 자꾸 힐끗 뒤돌아 보면서 얘기하길래 그냥 내가 추정해 본다
A가 이제야 상황을 모두 이해한 듯하다.
9호선 급행역 탑승구간에서 서로 만난다. B의 소개로 A와 나는 서로 통성명한다. 나보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에드위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있다고 한다. 전철 같은 칸에서 나를 꽤 오랫동안 지켜봤다 한다.
맨날 같은 책을 들고 몇 달째 형광펜으로 긋고 있으니 무슨 그림을 그리나 했을지도 모른다. (위에 올린 사진처럼 여섯 권이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나를 이상하게 봤음에 틀림없다. 아니면, 그냥 읽는 척하는 사람으로 봤을지도.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그냥 다른 것 하는 거보다 더 어려울 텐데!)
몇 번을 읽었냐고 묻길래 세 번째라 답한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과 똑같이 ‘같은 책을 세 번 이상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 자기는 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거의 모든 책은 한번 이상 안 본다.’ 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A는 회사에서도 아주 유명한 독서가이자 엘리트라 한다. 회사에서 두뇌 회전이 매우 빨라야 하는 부서의 팀장 출신으로 분기에 한 번씩 공감서재에 책을 기부하는 제도가 있는데 거기에 매번 1순위 기부자다.
(혹시라도 내가 잘난 척한 게 없는지 돌이켜 본다. 다행히 특별한 것은 없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 단 한 권도 기부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주로 형광펜을 그어 놓기도 하고 또 평생을 두고 읽어야 할 책인 데다가 영어로 쓰인 것이라 회사가 받아 줄 리가 만무하다. 결정적으로 내가 남에게 빌려주거나 기부할 책은 아예 사지 않는다.
어쨌든, ’대단하다!‘한다. 내가 읽는 방식으로 ‘따라 해 보겠다!’ 한다. 그리고 책을 한 권 추천해 달라고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책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한테. 내가 읽은 책을 소개하면 대부분 덜컥 산다. (아마, 나를 만만하게 봐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몇 달이 지난 후 꼭 한 두 페이지 읽고 덮어두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입이 가벼운 나를 탓하며 뉘우친다. 그동안 내가 추천한 책은 ‘How to read a book, The Wealth of Nations, Capital, A Theory of Justice'따위다. (The Economist 도 Financial Times도 마찬가지다.)
비싼 돈 써가며 샀을 텐데 괜히 말했다 싶다. 1년 치 잡지 정기구독은 또 어쩌나! 앞으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일단,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알게 모르게 은근슬쩍 다른 칸으로 옮긴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후 A는 회사를 옮겼다고 한다. 서로가 가깝지 않아 그 이후의 소식은 모른다.
내가 하는 독서법을 해 보았는지 궁금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