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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두 잔 고객님, 통장 나왔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재미없게 쓰기 (4)

by 들풀생각

영업점에서 근무하던 대리 때(1997년) 얘기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새로 개설한 영업점이다. 과천에서 빌딩관리가 가장 엄격하여 깨끗하기로 유명한 모 금융회사 빌딩 2층에 입주했다. 이른 아침 관악산의 연주대를 배경 삼아 커피를 마실 때면 신선이 따로 없다.


날마다 아침에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지점을 찾아오는 어리숙한 아니면 덥수룩한 한 젊은이가 있다. 그도 내가 즐기는 신선놀음을 알아챈듯하다.


​객장의 서재 앞에 놓인 Mr Lee 인지 Miss Lee 인지하는 커피 자판기를 찾아온다. 당연히 커피는 공짜다. 한 잔을 뽑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엔 책자를 들고 서재로 들어간다. 그리고 심각하게 책을 보는 척한다. 한 잔을 다 마신 후, 사무실을 나선다. 나갈 때는 반드시 오른손과 왼손에 커피를 들고 책자는 오른쪽 겨드랑이에 낀 체 겸연쩍은 표정을 남기며 객장을 떠난다.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들어올 때는 “어서 오십시오!”, 나갈 때는 “안녕히 가십시오!”를 기계적으로 외치며 인사한다.


​우리끼리 그를 “커피 두 잔”이라 부르기로 했다.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그가 쉬고 있는 서재로 들어가 본다.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토록 독서에 열심이신지를 물어본다. 과천 생활 안내 잡지만 보고 또 보는 듯하던데 독서가 너무 즐겁다 한다. 그리고,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갈 계획이라고도 한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겉모습이 다가 아니니, “대단합니다!” 하고 나온다.


​그러던, 어느 달 말일의 마감시간 무렵이다.


​느닷없이 그가 이 시간에 객장에 나타난다. 맨날 인사만 받고 커피 신세만 지는 게 눈치가 보였던지 MMF 계좌를 개설하겠다고 한다. 유학자금을 준비하기 위한 목돈 마련이라 한다. 그러고는 10,000원을 입금한다.


​그날따라 큰돈을 펀드에 투자하려고 기다리는 고객이 아주 많다. 또 공모주도 청약하는 날이다. 은행 등에 공과금을 납부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런 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하필 이런 바쁜 날에 선심용 계좌를 개설할 줄이야!


​통장을 다 만들고 고객에게 교부할 차례다. 하루 종일 고객 응대로 몸과 마음이 다 바빴던 신입 여직원이 고의인지 과실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큰 소리로 또박또박 “커피 두 잔 고객님, 통장 나왔습니다!”라고 한다.


​대기 중이든 고객들이 모두 이쪽으로 쳐다본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우리끼리 몰래 부르던 그의 별명을 대놓고 부르고 말았다. 분명히, 억양과 소리의 크기 및 표정으로 봐서는 고의로 강하게 추정된다.


책임자(결재) 석에 ​있던 나는 자리에서 뒤돌며 품위 있게 표정관리를 하려 한다. 그러나 채신머리없는 나의 몸짓은 체통을 지키기엔 힘이 부친 듯했다…



(Epilogue)


​그는 그날 이후로 통장 잔고를 평잔 10,000원만 유지하며 계속 커피 두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내가 근무한 기간인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지점에 출근 아닌 출근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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