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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경으로 책 보던 그 어르신

앎과 삶 그리고 깨달음 (1)

by 들풀생각

요즘 내가 읽는 것들 가운데 글자크기가 가장 ‘적은 ’것은 The Economist이다.


회사에서는 주로 Financial Times를 보기 때문에 The Economist는 짬을 내서 퇴근하는 길 전철에서 본다. 북적대는 전철안에서 보기에 알맞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나마 글자가 조금 보였다.


그러나, 이젠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글자가 눈에 아른 거려 읽어 내기가 버겁다. 내용이 어려운 데다가 글자까지 안보이니 엎친데 겹친 격이다.


그래서 아침 출근길엔 이것 보다 글자가 큰 원서를 본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기 때문에 전철을 타면 자리에 앉을 수 있어 두꺼운 책을 보기에 딱 좋다. 더군다나, 깊이 생각할 수도 있고 노란색 형광펜으로 나만의 signature를 남기기에도 편하다.


그러나, 이제는 퇴근길에도 원서를 들어야 한다!


시력 탓으로 돌리고 지난 주말에 범계역에 있는 으뜸안경 50에 들렀다. 시력검사를 하니 현재 쓰고 있는 다중초점렌즈를 그대로 쓰라 한다. 이 안경은 전체 렌즈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가장 아랫부분은 돋보기 노릇을 하고 중간 부분은 약간 멀리 나머지 윗부분은 저 멀리에 있는 물체를 보도록 설계되어 있다. 안구 운동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기구다.


맨 처음 이 안경을 쓰게 된 것은 이렇다. 복잡한 전철에서 책을 보는데 앞사람이 자꾸 밀쳐 눈 가까이 책을 붙였더니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의 불편함을 없애 보려고 큰돈 칠십만 원을 들여 마련했다. 다중초점렌즈를 사용한 지는 대략 5년 정도 된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은 2년 전에 다시 교정하고 안경테도 고급으로 새로 맞춘 것이다.


책을 보는데 너무 불편하다고 하니 돋보기안경을 권한다. 이것을 쓰니 작은 글자가 아주 잘 보인다. 매우 만족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자리를 고정해서 읽어야 하고 20분마다 잠시 쉬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띵하고 움직일 때는 반드시 벗어야 한다. 불편하지만 중년인 나한테는 독서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팔만 원을 들여 바로 샀다.

출•퇴근 시 다중초점렌즈를 껴서 원서를 보고 사무실과 서재에서는 돋보기로 작은 글씨체의 신문과 잡지를 보는 것으로 또 다른 나와 타협함

말 그대로 늙어서 시력이 나빠지는 노안이 된 것이다. 처음엔 늙어간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쓰지 않으려고 버텼다. 하지만, 그놈의 책이 무엇인지 결국은 무릎을 꿇었다.


안경점을 나오면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평촌도서관에서 The Economist를 읽을 때 일이다. 연세가 많이 드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으며 내 옆자리로 앉으셨다. 무슨 공부를 하시나 궁금해서 책을 보는 척하며 가만히 지켜봤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셨는데 예상대로 논어(論語)였다. 온통 한문 투성이인 그 책은 다른 것과 달리 글자 크기가 엄청 컸다. 그 옛날 시골에서 아버지께서 보시던 것과 비슷했다. 큰 활자본으로 구성된 너덜너덜해진 누런 종이 책이었다. 글자크기가 얼마나 크던지 종이 한 면에 몇 글자가 들어가지 않아 보였다.


나를 아주 놀라게 한 것은 그다음 일이다!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가방에서 확대경을 꺼내 드신다. 그러고 나서는 눈을 바짝 붙여가며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가신다. 할아버지의 학구열이 경이롭다 못해 존경의 마음까지 들었다.


이 광경을 보고서 당시 30대인 나는 다짐했다.


나도 저 어르신의 연세까지는 못 가더라도 최소한 20년 후에는 한문 대신 영어원서를 저렇게 뚫어지게 보겠노라고.


내 주변에는 눈이 안 보인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을 멀리하는 또래 사람들이 많다. 젊었을 때 나도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사실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들의 나이가 되어 보니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찌감치 손에서 책을 놓으니 지력이 떨어져 문장을 이해하는 힘이 모자란다. 그래서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책을 읽는 재미가 없을 수밖에…


때때로 20년 후에 눈이 잘 안 보일 때를 대비해 영어 대신 한문을 배울까도 생각해 봤다.


아서라!


배운 게 도둑질인데 하던 거나 제대로 하자.


지금은 돌아가셨을 그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오늘도 한 글자, 한 문장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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