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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연 Feb 22. 2022

2월, 산책




  토요일, 오후 세 시쯤 용문산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눈발이 하나 둘 날리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보니 옅은 눈구름이 겹겹이 서 있는 산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용문사까지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상가 뒤의 작은 동네를 산책하기로 했다.

  눈은 점점 많이 내렸다. 남편이 차에 우산을 가지러 간 동안 나는 어느 집 대문 앞 짧은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나무 타는 냄새가 골목을 떠돌았다. 눈은 춤을 추듯 바람에 날리며 하얀 점으로 공간을 메웠다. 그 배경 안으로 남편이 걸어 들어왔다.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여기 우산.” 그가 내게 우산을 건네며 물었다. “쓸 거야?”

  “응.”

  나는 우산을 받아 활짝 폈다. 진회색의 큰 우산이었다.

  구석구석 돌아봐야 2천 보도 안 되는 작은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거의가 지붕이 낮고 정겨운 창이 달린 기와집들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나도 그런 집에 산 적이 있었다. 방에 누워 있으면 골목을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맞히는 걸 신기하게 여겼다. 한 번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조부모 몰래 영화를 보고 밤늦게 들어와 내가 자고 있던 방의 창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겠다던 나는 그날따라 일찌감치 깊은 잠에 빠졌고 결국 할머니가 대문을 열어 주었다.     


  과시적이지 않고 방어적이지도 않은 집들이 묵묵히 눈을 맞고 있었다. 골목 끝에 새로 지은 집은 북카페였다. 유리창틀에는 도도한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눈 그쳤는데 우산 꺼.”

  남편이 말했다.

  “그냥 쓰고 있을래. 바람 막아줘서 좋아.”

  앞서 걷던 내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추워서 어깨가 얼얼해오던 참이었다.

  골목 끝에 할머니 세 분이 팔기 위해 늘어놓았던 은행이랑, 각종 엿, 더덕, 마른 버섯 등을 주섬주섬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군밤 얼마예요?”

  서너 살 정도의 아이를 데리고 가던 부부가 물었다.

  “오천 원!”

  연탄불 위 철망에 밤이 약간 담겨 있었다.

  “너무 비싸요.”

  그들이 말하고 그냥 지나쳤다.

  “아이고, 추워서 더 못 있겠다. 4천 원! 그냥 3천 원에 다 가져가.”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할머니가 외쳤다.

  군밤의 구수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나는 진심으로 군밤을 사고 싶었다. 전 같으면 4천 원쯤에 냉큼 샀을 것이다. 그 단내 나는 밤을 딱 하나만 먹고 자제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사실 딱 하나도 안 될 일이다. 뭔가를 자제해야 하는 게 슬픈 일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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