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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연 Apr 21. 2022

목련은 말없이




  산책을 하다가 땅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밟았다. 미끄러웠다. 아이보리 색이었던 꽃잎은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래전 한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강사에게 물었다.

  “저를 꽃에 비유하면 어떤 꽃이 어울릴까요?”

  전직 교수였던 그녀는 꽃에 관한 책을 써서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얼른 떠오르는 꽃이 없어서 당혹스러운 듯 강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까이 앉아 있던 나는 작은 소리로 ‘목련’이라고 말했다.

  “목련이 어울릴 것 같네요.”

  내 말을 들은 그가 재빨리 대답했다.

  “목련이라고요? 지는 모습이 가장 추한 꽃이잖아요. 싫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강사뿐 아니라 목련을 추천했던 나도 덩달아 머쓱해졌다.      


  가장 좋아하는 꽃은 아니지만 목련은 꽃도 나무도 좋아한다. 목련 잎은 담백한 문장처럼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목련 나무 아래에 서서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청량한 기운이 느껴진다. 해마다(요즘은 더러 까먹기도 했지만) 갈색으로 물든 목련 낙엽을 커다란 종이봉투에 모아두곤 했다. 모닥불에 목련 잎을 던져 넣으면 계절에 상관없이 아련한 기억처럼 겨울이 떠오른다.       

  가을이 짙어져 단풍이 든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목련나무를 올려다보면 가지 끝마다 뾰족한 꽃봉오리가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꽃봉오리는 낙엽이 지기 전부터 돋아나 자라기 시작한다. 회색 털코트를 입은 꽃봉오리는 겨울을 나면서 조금씩 커진다.

  이른 봄, 뽀얗게 살을 찌운 목련꽃은 작아진 털코트를 봉오리 끝에 모자처럼 쓰고 있다. 포근한 봄은 곡우 무렵에야 찾아온다. 목련이 꽃을 피울 즈음, 햇볕은 따뜻하지만 기온은 쌀쌀하고 바람은 차갑다. 겨울을 난 봉오리가 벌어지고 꽃이 피면 나무 발치에 아무렇게나 벗어둔 목련의 겨울 외투가 소복하다. 비로소 고개를 들고 진주빛 드레스 자락을 활짝 펼치고 봄을 맞는 목련을 바라본다. 환한 횃불 같기도 하다. 겨우내 꿈꾸던 봄에게 제일 먼저 희고 고운 손을 내미는 목련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하면 그제야 목련은 마음을 놓고 꽃잎을 툭툭 떨어뜨린다.      


  요즘은 매일 공원을 걷는다. 꽃이 한창일 때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주 멈춰 서야 했다. 내 앞에 두세 살 쯤으로 보이는 손자의 손을 잡고 걷는 중년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손자를 벚꽃나무 밑에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남자가 막 떨어진 목련 꽃 잎 두 장을 주어와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는 꽃잎을 토끼 귀처럼 머리에 가져다 대고 미소 지었다.

  “하나 둘 셋!”

  여자가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아이는 “깡충!” 하며 언덕에서 뛰어내려 여자의 품에 안기려고 했다. 여자는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하하 웃었다.      


  지는 모습이 예쁜 꽃도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은 그림자도 예쁘다고 말하는 것처럼, 목련 역시 이것저것 다 포함해서 입체적으로 좋아해 주면 좋겠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목련은 가만히 가지 끝에 연둣빛 잎사귀를 밀어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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