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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연 Mar 30. 2022

수선화가 있는 곳




  지난주 토요일, 수선화로 유명한 서산 유기방 가옥에 갔다. 오래된 한옥 뒤편에만 꽃이 있었고 나머지는 이제 막 봉우리를 밀어낸 정도였다. 검붉고 찰진 흙이 드러난 길을 걸었다. 부드럽고 좋았다. 언덕 위쪽은 소나무 군락지였다. 마스크 안으로 솔향이 느껴졌다. 땅 위에 굵고 단단해 보이는 수선화 이파리들이 쑥쑥 솟아 있었다. 

  그 사잇길을 우리보다 앞서 걷던 젊은 연인들은 순정한 초록 잎만큼이나 싱그러웠다. 남자는 카키색 면바지와 흰 티셔츠에 네이비색 얇은 카디건을 입었고, 여자는 달랑 얇은 셔츠 위에 니트를 숄처럼 걸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패딩 점퍼의 지퍼를 단단히 여미고 꼼꼼히 모자까지 챙겨 쓴 우리 부부는 그들과 얼마간 간격을 두고 걸었다.      


  올 때마다 수선화는 공간을 넓히고 있었다. 소리 없이 언덕을 정복하더니 고개를 넘어 비탈을 내려갔다. 그 넓은 수선화의 무대에서 한 남자가 신발을 벗어두고 양말 발로 비옥한 흙 속에 태연히 서서 일을 하고 있었다. 유기방이었다.      


  “다른 꽃도 많은데 왜 수선화를 심으셨어요?”

  내가 물었다. 

  “화단에 수선화가 있어서 옮겨 심었어요. 여기가 온통 대밭이었는데, 내가 다 베고 심었다오. 이놈들이 번식력이 엄청 좋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습관처럼 사연을 기대했던 나는 히죽 웃었다. 

  “그냥 꾸준히 심고, 돌보는 거지. 주변에 나눠주기도 엄청 나눠 줬어요……”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뭔가 이유가, 목적이,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강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저 할 수 있는 거지. 

  수선화가 예쁘고 기특하잖아. 봄 한때 잠깐 폈다가 스러지는 꽃을 보기 위해 심고 가꾸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기쁜 삶인 거야.      


  나도…….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바위가 압도적인 안국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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