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서연 Mar 22. 2022

어떤 낙서




  공원을 크게 돌았다. 8천 보를 걸었다. 인공 시냇물 옆 언덕 위 나무 사이로 걸었다. 도로 옆이었지만 산속을 걷는 것처럼 땅 위로 나무뿌리가 드러나 있는 곳이 많았다. 길은 가끔 횡단보도로 나뉘었다. 그중 한 횡단보도를 지나 다시 언덕을 오르려고 할 때 누군가가 땅바닥에 나뭇가지 같은 걸로 크게 써놓은 낙서가 눈에 띄었다.      

  ‘울고 싶다’     


  앞뒤 없는 싱거운 고백에 잠깐 웃음이 나왔다. 정말 울고 싶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이 울었겠지. 이런 낙서를 한 사람은 아마 눈물은 나오지 않고 그냥 마음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크게 울었을 때는 6, 7년 전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자초한 면도 없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 펑펑 울었다. 차 안은 내게 가장 좋은 개인 공간이었다.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다. 결국 (좋게 말해 엄청 느긋했던 사람이) 더 좋은(고생을 마다하지 않는(이게좋은 건가?)) 쪽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었다.      


  낙서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지인이 오래된 온천탕에서 본 문신에 대해 이야기했던 게 떠올랐다.

  지방으로 출장을 갔던 지인은 저녁에 그 지역의 유명한 온천탕에 들렀다. 탕 속의 뜨거운 물에 몸이 적응할 즈음, 한 남자가 들어와 팔로 물을 휘휘 저으며 자리를 잡았다. 지인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한쪽으로 조금 비켜 앉다가 그 문신을 보았다.      


  ‘잊어야지’     


  팔뚝 안쪽에 궁서체로 새긴 그 문신이 어찌나 비장하고 뜬금없던지 자꾸 눈길이 갔다. 생각 같아서는 그 남자를 자세히 뜯어보고 ‘뭘 잊어요?’하고 묻고 싶었지만, 뜨거운 기색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늙은 문신남을 지인은 속절없이 한두 번 흘끗거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왠지 그 사람보다 먼저 탕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으로 훑어가며 오랫동안 탕에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데요?”

  내가 물었다.

  “글쎄, 설경구를 닮았다고 할까? 오정세를 닮았다고 할까?”

  지인이 대답했다.

  “둘이 너무 다른데요?”

  “여기, 팔자주름이 똑같았어.”

  콧볼에서 입 옆으로 손가락을 쓸어내리며 지인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한동안 무슨 말만 하면 ‘잊어야지’를 남발하곤 했다.      


  잊어야지. 그리고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작가의 이전글 외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