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이 글에서 나는 ‘영숙’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려 한다.
실제 인물의 이름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름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추상적이고,
‘동료’라 하기엔 그가 남긴 장면들이 너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영숙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질투와 불안이 어떻게 인간의 관계를 왜곡시키는지를 기록한 관찰기다.
영숙은 3명이 한 팀인 셀의 장이다.
세 명 중 두 명이 도시락을 싸왔다.
도시락을 싸 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영숙은 혼자 남았다.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는 듯했다.
혼자 있는 영숙에게 어느 누구도 같이 식사를 제안하지 않았고
영숙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같이 먹자 이야기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 오는 것에 '괜찮다, 난 알아서 먹겠다'라고 말했지만, 며칠이 지나니
왠지 전과 다르게 그 둘을 향해 조금 더 까칠해진 듯했다.
사소한 말투를 문제 삼거나, 괜히 꼬투리를 잡았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다.
대신 “같이 점심 드시죠”라고 말했다.
영숙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따라나섰다.
둘의 표정에는 옅은 미소와 한숨이 섞여 있는 듯했다.
나는 영숙의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나와의 관계에서도, 그 둘 이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숙은 혼자 남는 걸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외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관계의 중심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걸 싫어하는 듯했다.
그는 항상 누군가를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반드시 한 사람은 소외되어야 했다.
셋이 있으면 한 명, 넷이 있어도 한 명.
균형이 맞으면 불안해지는 사람.
그 불안이 관계를 통제했고 관계의 형태를 결정했다.
영숙이 사람을 통제하려는 이유가
꼭 권력욕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중심에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을 수 있다.
칭찬받는 인턴이나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후배에게 조차 불안을 느낀 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와 영숙, 그리고 또 다른 팀원 셋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팀원과 가까운 사이였고,
나와 영숙은 예전에 이견으로 트러블이 있었다.
나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생각했지만,
영숙은 여전히 나를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식사 내내 영숙은 그 팀원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팀원은 대체로 성의껏 대답했고,
나와도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그런데 영숙은 그때마다 말을 끊고,
억지로 텐션을 높이며 다시 팀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 장면을 기억하며 생각했다.
영숙은 대화를 주도하려는 게 아니라,
관계의 중심을 놓치지 않으려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자신의 바닥을 보였던 나를 소외시키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팀원을 잡아두기엔 주제가 깊지 않았고
관심은 자연스럽게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영숙의 얼굴에는 짧은 짜증이 스쳤다.
그에게 관계란 소통이 아니라,
누가 가운데 서 있느냐를 확인하는 구조였다.
회식 자리도 비슷했다.
영숙이 있는 자리는 언제나 시끄러웠다.
분위기만 보면 어느 자리보다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떠들고 있는 건 늘 영숙 혼자였다.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러, 화장실에 가러 하나둘 자리를 비우면
그때서야 영숙의 표정이 잠깐 지쳐 보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다시 방긋 웃으며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렸다.
마치 자기를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연기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현타에 지친 영숙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불쌍해 보였다.
그는 늘 중심에 있으려 했지만,
정작 아무도 그 중심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에 속으로 계속 화가 나고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일관된 특징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뒷말로 균형을 맞추려 한다.
직접 부딪치기보단, 보이지 않는 말로 사람의 위치를 바꾼다.
그 결과, 어느 순간 누군가가 원치 않게
‘안 좋은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
그들에게 평판은 통제의 또 다른 수단이다.
영숙 같은 사람을 마주하면 처음엔 혼란스럽다.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지, 피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답은 서서히 드러난다.
그들과 맞서 싸우는 건 위험하다.
그들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건드리면 언제든 공격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직면은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멀리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들과 거리를 두면 그 불안한 에너지가 닿지 않는다.
일로만 연결하고, 감정의 회로는 차단한다.
심리적 비접촉,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상황상 피할 수 없다면
가끔은 통제당하는 척하는 게 낫다.
그들의 안정을 허락하는 척하면서
내면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다.
이건 비굴함이 아니라, 나를 소모하지 않기 위한 전략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자신의 평판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그래서 그들이 어둠 속에서 움직일 때,
그 어둠을 드러내야 한다.
뒷말은 어둠 속에서만 힘을 갖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3자 대면을 만들어라.
그들이 한 이야기를 양지로 끌어올려
직접 확인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언어는 힘을 잃는다.
그들은 빛 속에서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무기는 항상 그림자였으니까.
가끔 영숙을 떠올리면 복잡하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믿지 못하니, 결국 타인을 통해 버티려 했던 사람.
그는 늘 중심에 서고 싶어 했지만,
정작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질투형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태도를 택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들에겐 잔인할지라도 경험자로서 마지막 방법을 추천한다.
이 글을 읽는 중 내가 영숙이었나? 생각이 든다면
내 편을 만들려 하지 말고,
누군가를 내 곁에 묶어두려 하지 마라.
결국 관계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순간,
그 관계는 이미 불안에 물든다.
영숙의 질투는 ‘불신’에서 오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 불신을 덮기 위한 관계의 과잉.
진짜 중심은 ‘관심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안쪽’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