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에 새겨진
나다니엘은 미국의 재벌가에서 새 행성 개척이라는 자기만의 목표를 이루려는 삶을 살았다. 이서는 한국의 변방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삶을 살았다. 이번 생에 접점이 없이 태어났다는 건, 각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나다니엘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고야 말겠다는 욕망은, 뭐랄까, 욕망이 아니라 의무감처럼 느껴졌거든요.’
서루는 전생의 사랑, 세라이아를 카르마 깊이 새겨놓았다.
이서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50년을 혼자만의 사랑으로 묻었던 감정인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다니엘 또한 출처를 알 수 없는 갈망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내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가 겪어야 했던 공허함이 이서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서의 오열에 나다니엘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그녀를 품에 안았다. 왜 갑자기 우는 거지? 이서가 뿜어내는 오열은 오랜 시간 숙성된 한이었다.
처음 영상에서 나다니엘을 보았을 때부터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었다. 초기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착각인지, 소설 같은 영감인지, 실재 경험했던 것들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우연히 나다니엘을 볼 때면 장면이 더욱 선명해지며 세포 하나하나가 그 장면에서 느낀 감정을 뿜어댔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접었었다. 그의 옆에는 항상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다. 만약 이서가 자신의 기억 하나만 믿고 그의 앞에 나선다고 치자. 그의 고급스러운 눈길이 시골 아줌마에게 올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배신감과 초라함이 올라왔다. 부정적인 감정은 이서를 우울하게 했고, 이 땅에 더 많은 영적 각성자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잊게 만들었다.
‘그와 내가 이렇게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건 신의 뜻이야. 우리는 각자 할 일이 있는 거지. 그 일에 집중해야해. 이번 생에는 인연이 닿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난 이 마음을 묻어야해.’
그렇게 30년을 살았는데, 사실은 나다니엘도 이서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서는 자신의 초라한 외모가 두려워 나다니엘 앞에 나서지 않았다. ‘신의 뜻’이라고 변명을 해 가면서……. 전생에도 서루를 외롭게 두었었는데, 이번 생에도 나다니엘을 외롭게 두고야 말았다.
미안함, 자괴감, 애틋함이 한꺼번에 폭발해 버렸다. 이서는 자신을 안은 나다니엘의 팔을 풀고 자신의 작은 품 안에 나다니엘은 품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마음은 쉼 없이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뱉어낼 수 없었다.
이서의 품안에서 나다니엘이 속삭였다.
“나랑 같이 노바리스 에테리아로 갑시다. 내가 떠나기 전에 당신을 찾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나다니엘은 순수한 열망을 담은 파란 눈으로 이서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이서는 그를 품었던 팔을 풀었다. 조금 새침한 표정으로(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당신의 전처들과 함께 말인가요?”
말해놓고 나니, 아직까지 질투하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나다니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변명하듯 급히 덧붙였다.
“그들은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에요. 이 마음은 당신에게만 향한 거예요.”
안 해도 될 변명을 하는 나다니엘에게 또 미안해져 이서는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알아요, 그냥 한 말이에요.”
이서의 말에 안도한 나다니엘이 다시 물었다.
“노바리스 에테리아에 같이 갈 거죠?”
그 때 아래에서 누군가 길을 올라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서로에게 붙잡혔던 두 사람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어둠 때문에 나무줄기가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제야 이서와 나다니엘은 밤이 된 것을 인지했다. 서로가 빛으로 느껴져 해가 진 줄도 몰랐던 것이다.
어둠 속 나무 그림자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강률이었다.
“스승님?”
강률이 먼저 두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다.
“어, 강률아. 무슨 일이야?”
“사형들이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식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습니다.”
그제야 이서는 ‘아차!’ 싶었다. 그녀는 늘 제자들과 저녁 시간을 함께 했었다. 제자들이 그녀를 기다리느라 밥도 못 먹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이 몇 시지? 아이고, 친구랑 이야기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미안해라. 어쩌지? 많이들 배고프겠다.”
이서가 주절거리며 서두르는 모습을 본 나다니엘도 자신의 본모습과 다르게 허둥거리며 이서와 강률을 따라갔다.
식당 안의 제자들은, 솔직히 털어놓자면 스승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5일장에서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먹고 온 터라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나다니엘 위트모어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성을 수행하는 이들이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나다니엘을 모를 수는 없었다.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할 실행을 처음으로 하는 지구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왔데?”
라는 질문에는 다연이 답을 주었다.
“나다니엘은 종교인들을 싫어해.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은 영성가를 종교인 대신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내 생각에 나다니엘이 찍은 영성가가 우리 스승님 같아.”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 중 ‘새 행성의 최초 영성가가 되는 건 어떤 걸까?’ 상상하며 자기에게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었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는 나다니엘이 왜 왔는지 본인의 입을 통해 답을 듣고 싶은 것이다. 만약 스승님을 새 행성으로 데려가겠다면 ‘나도 같이!’라고 주장하고 싶은데, 어떻게 자기소개를 해야 나다니엘에게 먹힐까 고민하느라, 그들 역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 스승님과 나다니엘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제자들은 긴장했다.
“미안, 미안. 얘들아, 배고프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하며 자리에 앉은 이서. 그 옆에 앉는 나다니엘. 제자들의 시선은 나다니엘에게 일제히 꽂혔다. 분위기를 단번에 알아 챈 이서는
“내 오랜 친구 나다니엘 위트모어야.”
하고 소개했다. 제자들은 일제히 또한 각자 “안녕하십니까?”, “나이스투미트유”, “헬로” 등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눈은 또랑또랑하게 ‘살다보니 이런 광경을 다 보네!’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수하고,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면서도 야망을 가진 젊은이들. 이서는 제자들의 그런 모습이 귀여워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두 명의 제자도 보였다. 강률과 다연이었다. 둘 다 근심의 에너지를 끌어안고 있었다.
강률의 시선은 스승인 이서에게 닿아 있었다. 스승이 떠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다연의 시선은 자기 안으로 숨겨져 있었다. 다연의 육체에서 어두운 에너지가 스멀스멀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서는 깊은 숨을 내 쉬고 제자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발표했다.
“나는 노바리스 에테리아로 떠나기로 했어.”
그녀의 선언을 들은 제자들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밀려나왔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노란색, 오렌지색, 초록색의 에너지색들이 식당 안에 꽉 들어찼다.
아름답고 밝은 에너지 틈에 끼지 못하는 에너지 두 개가 주인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운…’ 검붉은 에너지가 다연과 강률의 몸을 둘러쌌다.
이서의 눈이 강률의 눈과 마주쳤다. 강률이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가지 마세요!’
이서는 강률의 시선을 떨쳐내고 다연을 바라보았다. 다연은 이 문제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자기 머릿속에서 열심히 답을 구하고 있었다.
‘일단, 대장한테 연락을 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