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
해가 진 지 한 참이나 지났다. 굵어진 빗줄기는 사그라질 기미가 전혀 없었다. 개인 숙소 문 앞에서 서성이던 세라이아는 서루의 집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있겠지?’
생각은 그렇게 했는데 기분은 영 찜찜하다. 이런 경우에는 기분이 맞다고 봐야 한다. 세라이아는 서루의 집으로 갔다. 만약 집에 없으면 어쩌지? 어디에서 찾아야 하지? 혹시 야생맹수에게 물린 건 아니겠지?
세라이아는 서루를 처음 만날 날을 방금 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엉클어진 검은 머리, 탄탄한 구릿빛 피부, 검댕이가 묻은 얼굴, 순간순간 변하는 표정, 호기심에 가득 차 세라이아를 훑어보던 순진한 두 눈. 서루의 눈은 유리처럼 맑아 그 안에 든 영혼의 생각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이 얼마나 순수한 존재란 말인가!
그녀는 온 얼굴에 호기심과 놀라움, 환희를 품고 물었다. “넌 사람 아니지?”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하마터면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출 뻔 했었다. 동료들이 에너지를 모아 세라이아의 형체를 우주선으로 끌어가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인간들이 귀여운 강아지를 품에 안고 부둥부둥하는 마음, 아마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서루, 집에 있어?”
세라이아는 문 밖에 안에 대고 물었다. 잠시 후, 짚을 엮어 만든 문이 열리며 서루의 엄마가 나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신께서 어쩐 일이신가요? 혹시 우리 서루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아니, 아닙니다. 낮부터 안 보여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들려봤어요.”
서루 엄마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비에 젖은 땅에 엎드리더니 말했다.
“신께서 어찌 우리 같은 인간에게 존댓말을 쓰십니까?”
세라이아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서루의 엄마를 일으켰다. 달에게 가르침을 받는 족장이 부족들에게 ‘신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라고’ 말했을 것이다.
“듣기 불편한가? 서루는 집에 있나?”
“아닙니다. 그 애는 요즘 동굴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거든요. 배나 고파야 기어들어옵니다. 지금도 동굴에서 그림 그리고 있을 겁니다.”
세라이아도 짐작한 바였다.
서루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워낙에 일이 많아 서루의 그림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오늘은 비가 오는 통에 일과가 한가해졌다. 그러니, 몇 시간 전부터 서루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있지.
“그 애를 데리고 올까요?”
서루의 엄마는 조심성 없는 딸내미가 신에게 큰 실수라도 했을까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마음을 느낀 세라이아는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찾아볼게. 서루가 뭘 잘못해서 찾는 거 아니야. 걱정돼서 찾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안심 반, 의심 반의 얼굴을 하고 엄마는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이 되는 이 마음도 인간이 강아지를 대할 때의 감정일까?
세라이아는 서루가 있는 동굴 앞에 섰다. 비를 홀딱 맞은 채였다.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어른 거렸다.
저 안에 서루가 있다. 그녀가 있다는 생각이 올라오니 걱정은 사라졌지만, 애틋한 마음이 올라왔다.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서루였지만, 직접 보고 싶었다. 이 감정도 인간이 강아지를 대할 때의 감정인가?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그런 게 아니야.
‘보고 싶다, 빨리 보고 싶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빨리 보고 싶다.’
하지만, 세라이라는 혹시 서루가 놀랄까봐 헛기침으로 신호를 보내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검정 돌을 손에 쥔 채 고개를 돌린 서루와 눈이 마주쳤다. 서루의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왜인지 서루를 본 순간 세라이아의 등에서도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밥은 먹었어?”
세라이아가 물었다. 서루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세라이아가 서루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며 그녀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물었다.
“왜 날 피하는 거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서루의 두 눈을 직접 봐야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서루는 틈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는데, 서루로서는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서였다.
‘감히 네까짓 게? 우리 신족을 좋아한다고?’
자기가 사랑하는 존재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까 무서웠다.
세라이아는 동굴 벽에 수두룩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았다. 이들은 자기에게 중요한 요소를 크게 그리는 습관이 있다. 어쩔 수 없다. 숨통이 붙어 있는 생물의 눈에는 자기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눈에 확 띄는 법이다.
벽에는 한 남자의 형상이 가장 크게 그려져 있었다. 서루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다. 그 형상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세라이아는 그림에서 눈을 돌려 서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그녀에게 풍겨오는 에너지로 세라이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화는 세라이아를 향한 부분도 있었지만, 서루 자신에 대한 분노가 컸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에서는
“나는 네가 싫어.”
말로 터져 나왔다.
서루가 품은 마음의 에너지가 더 진하게 세라이아에게 전해졌다. 무겁고 아픈 에너지였다. 너무도 절절해서 심장이 끊어질 듯한 아픔이었다. 세라이아도 똑같은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다. 서루가 세라이아의 시선을 피해 도망갈 때마다 느꼈던 것이었다. 세라이아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좋은데?”
그제야 서루가 세라이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가 좋은 만큼 싫어.”
좋은 만큼 싫다는 건 무슨 말이야?
“네가 너무, 너무 좋은데,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널 미워하는 마음도 같이 커져.”
“…….”
서루를 찾으러 비를 맞으며 걸어올 때부터 세라이아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 되고, 보고 싶고, 웃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다른 인간들에게는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신족이 인간에게 품는 마음은 연민이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연민과는 다른, 어떤 소중한 감정이 그를 장악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민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까지만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감정은 그것을 넘어섰다. 상대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다.
동굴에 들어설 때 느꼈던 등짝의 열감이 다시 세라이아를 감쌌다. 이제는 심장도 뜨겁게 달궈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미워하지 않을까?”
세라이아가 물었다. 서루가 세라이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두 눈엔 ‘나도 그것이 알고 싶어.’라는 대답이 들어 있었지만, 세라이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서루를 품 안에 품었다. 그리고,
둘은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