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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숙명

망각

by 안이서

그 밤 이후, 세라이아는 우주선에 감금된 상태였다. 그의 머리칼이 검게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상해, 이상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세라이아의 변화를 본 달은 몹시도 당황해 했다.

“그래, 나도 인정하긴 해. 그들의 육체가 워낙 탐스럽기는 하지. 인간과 육체관계를 맺은 다른 신족도 분명 있기는 했어. 그렇다고 그들의 머리칼이 검게 변하지는 않았어.”

세라이아도 자신의 검은 머리칼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을 향한 연민, 서루를 향한 사랑이 변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 관계를 한 신족은 그 희열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더라. 그 희열감이 어떤 것이기에 환장을 하는 건지 궁금했어. 결국 나도 알아버렸지. ‘이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환희야.’하면서 한 신족이 내게 가르쳐 줬거든.”

달은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세라이아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그리고 세라이아의 허벅지에 손을 얹어 은밀하게 쓰다듬었다.

“너도 이제는 알게 됐으니까, 널 향한 내 욕망이 무엇인지 알겠지?”

세라이아는 달의 손길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늘 그를 불안하게 했던 그녀의 눈에 얽힌 욕망.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알았기 때문에 그녀가 더 부담스러웠다.

세라이아는 서루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와 하나가 되었다. 서루도 세라이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뭇 남자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싫어했다. 그런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세라이아는 왠지 모르게 안도 했었다. 그리고 달과 자신이 함께 있을 때 서루가 왜 슬퍼했는지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난, 당신과 육체관계를 가질 생각이 없어.”

“그 아이 때문에? 순진한 척 하는 앙큼한 아이?”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싶지 않아.”

달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경멸에 찬 눈빛이었다.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 넌, 넌 타락했어!”

달은 세라이아의 검게 변한 머리칼을 가리키며 새된 소리로 외쳤다.

“검게 물든 네 머리칼, 그게 타락의 증거야!”


그렇게 세라이아는 감금됐다. 달의 주장에 반대하는 신족도 있었지만, 달은 이들의 관리자격이라 감히 겉으로 의견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감금된 지 사흘 째 되는 날, 서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이아?”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다른 신족이 알려줬어. 네가 이 안에 갇혀 있다고. 내 말 들려?”

“어! 들려, 서루야.”

세라이아는 대답을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우주선은 외부의 소리는 전부 흡수했지만, 안의 소리는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세라이아는 낙담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들려. 서루야, 네 목소리.”

밖에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서루의 침착한 목소리가 침묵을 열었다.

“혹시 안 들린다고 해도 난 내 안의 말을 꼭 해야겠어. 달이 그러더라. 내가 널 망쳐놨다고. 알량한 인간 따위가 신을 타락시켰다고. 30년 밖에 못 사는 인간이 신을 탐했데. 넌 영원히 살지만, 나는 얼마 못 살고 죽을 거래. 죽으면 영원히 사라지는 거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데. 그런 존재가 신을 농락했다고 막 소리를 질렀어.”

세라이아는 그렇지 않다고 진실을 말해 주고 싶었다.

‘아니야, 달이 거짓말 한 거야. 네 영혼은 사라지지 않아. 이번 생의 경험을 끝냈을 뿐이야. 넌 다시 태어날 거야.’

“그런데, 네가 여기에 감금됐다고 말해 준 신족이 다른 얘기도 해 줬어. 달이 나를 두렵게 하려고 거짓말 한 거래. 지금의 삶이 끝나면 새로운 몸을 입고 이 땅에 다시 태어난데.”

‘그래, 맞아. 그거야.’

서루의 흐느끼는 소리가 밀려왔다.

세라이아의 마음도 흐느꼈다. 울지 말라고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감금돼 있고 움직일 수 없다. 사랑은 아름다운 만큼 고통스럽기도 하다.

“다시 태어나면 나는 널 잊을 거래. 지금 내가 겪은 경험들은 망각 속으로 숨을 거래. 흑흑흑……. 망각과 환생이 인간의 숙명이래. 세라이아, 나는 널 잊고 싶지 않아. 널 잊을 수 없어. 어떻게 널 잊어? 내가, 내가? 내가 널 어떻게 잊어,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차라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세라이아는 고통에 차 절규했다.

“네가 사라지면 나는?”

절규의 에너지가 어찌나 강했던지, 서루의 뇌 속에 전해졌다. 뇌로 흘러들어온 세라이아의 목소리에 서루는 울음을 그쳤다.

“방금 네 목소리를 들었어. 진짜 들은 건지, 내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명확한 목소리였어.”

잠시 말을 멈춘 서루는 깊이 다짐한 듯 단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달이 그러더라, ‘세라이아는 너 때문에 영원히 감금될 거야.’라고. 다른 신은 달이 내게 거짓말 한 거라고 했고.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세라이아, 난 널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수 십 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난 널 기억할 거야. 그리고 널 찾아낼 거야. 반드시… 반드시…….”


현재.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이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서는 재빨리 아프디 아픈 미소를 감췄다. 그리고 맑은 웃음을 지으며 과거 서루였던 나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은 전생에 여자였다는 거. 그리고 내 외모에 홀라당 반했었다는 거. 그 정도?”

그리고 자신의 말이 꽤 재미있는지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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