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은 감정
스승님과 나다니엘, 그 두 사람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둘 사이에 거리감은 0.01밀리미터도 없어 보였다. 어떤 접점이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강률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강률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저 아래 이서의 숙소 불은 아직 켜져 있다. 12시가 넘었다. 보통 이서의 방 불은 10시면 꺼진다. 낮부터 붙어 있는데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 걸까? 강률의 머릿속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표가 수 없이 떠다녔다.
이서는 강률을 포함해 제자들에겐 늘 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 본 그녀는, 소녀처럼 빛났다. 억지로 설렘을 숨기는 미묘한 표정들……,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강률은 안다. 사랑이다. 그도 그 미묘한 감정에 갇혀 헤어나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다.
강률은 어느 새 사랑에 빠졌던 10년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강률은 [회개와 새 삶] 용인 지부에서 2년 동안 강의를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과 다르게 대학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취업도 생각에 전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이 몸뚱아리도 실체 같지 않았다. 자기가 왜 이 땅에 사는 건지 고통스러운 의문에 빠져 살았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회개와 새 삶 선원]간판이 보였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데 중력에 빨려가듯 저절로 선원에 이끌렸다.
2년간 호흡 수련을 하다 몸 안에 기(氣)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고 싶어 이곳으로 왔다.
“이름이?”
“강률입니다. 서강률.”
“나이는?”
“스물 둘입니다.”
“요즘은 어린 친구들은 수행에 관심 없어 하던데.”
스승님은 지긋이 강률을 바라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던 강률은 이서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두 눈이 마주쳤을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게 더 부끄러워서 더, 더 뜨거워졌다. 왜 그랬을까?
스승님의 기이한 능력에 대해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승님은 사람들의 전생을 다 봐.’
‘스승님은 육체 내부를 꿰뚫어 보고 어디가 안 좋은지 다 볼 수 있어.’
‘스승님은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알아.’
아마 그 때 스승님이 강률의 생각을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당시 강률의 머릿속을 장악한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수행을 하면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빵 하나를 무한으로 늘렸던 것처럼, 돈을 무한으로 늘릴 수도 있을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사람들이 나를 신으로 경외하기도 하겠지?’
왠지 수행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명예와 경배에 대한 생각은 수시로 올라왔다. 기의 실체에 대한 이끌림 보다는, 수행을 완수했을 때 얻게 될(만한) 세상 사람들의 선망? 존경? 뭐,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야망이 강률을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마음 깊은 곳에 숨긴 속내를 스승님이 환하게 들여다 볼까봐 민망했던 것 같다.
스승님은 빙그레 웃었다.
“숨기고 싶은 게 많은가 보구나.”
“아, 아, 아 아니요. 전 그런 거 없어요.”
당황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늘 그렇듯, 강률도 일단 부정했다. 스승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용인지부는 호흡 수련 위주로 하나보네…….”
그리고 다시 강률을 쳐다보며 물었다.
“수련 중에 회개 과정은 없었니?”
스승님의 표정은 너무도 따뜻하고 다정했지만, 그 얼굴로 ‘회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니, 듣는 강률의 입장에서는 더, 더, 더 두려웠다.
“제가 뭘 회개해야 하는 거지요?”
강률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스승님은 강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우리 선원에서 ‘회개’는 잘못을 털어놓는 게 아니야. 자신의 무의식을 스스로 분석해 가는 걸 의미해. 말이 쉽지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일이야. 나중에 천천히 해 보자.”
모르겠다. 스승님의 말을 이해하기엔, 강률은 아직 어렸다. 막연하게 자신의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 것 같아 두려울 뿐이었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얼굴의 열기가 다시 확 올라왔다.
“나한테 뭐 숨기고 싶은 게 있니?”
그 말을 듣고 강률은 스승님이 상대방의 생각도 읽는 줄 알고 겁에 질려버렸다.
“스승님, 제 생각도 읽으시는 거예요?”
벼룩의 간만한 목소리로 물으니, 스승님은 하하하 웃었다.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내가 네 생각을 어떻게 읽니?”
스승님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강률을 바라보며 짓궂은 투로 말했다.
“설마 나한테 반해서 얼굴이 뻘개진 건 아닐 거고. 네 표정이, 정신 못 차리고 사료 통 뒤지다가 주인한테 걸린 강아지 같았어. 뭔가 내게 숨기고 싶은 잘못을 한 것처럼 말이야. 하하하!”
스승님은 큰 웃음을 거두고 잔잔한 미소를 띠며 강률을 바라보았다.
“스물둘이라, 네가 우리 선원 막내로구나. 잘 부탁한다.”
비록 스승님은 생각을 못 읽는다고 했지만, 그녀의 두 눈은 강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그 시선은 그의 치부마저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스승님의 시선을 느낀 강률의 영혼은 행복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강률은 스승님의 눈길을 ‘갈구’하게 됐다. 그녀의 시선 한 번이 다급했다. 그녀가 눈에 안 보이면 그리움이 허공에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그려 놓았다.
강률에게 이서는 스무 살이나 연상인 중년의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밤이면, 불 꺼진 그녀의 창을 바라보며 꿈에서라도 만나길 바랐다.
스승님은 늘 높은 곳에 있었지만, 밤이면 그 높이를 뛰어넘는 상상이 펼쳐졌다. 불 꺼진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욕망에 달궈진 그녀를 온 몸으로 휘감았다. 그 상상은 너무도 짜릿해 놓을 수 없는 하루의 마무리였다. 매일 밤 그랬다.
그러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다시 순수한 청년으로 돌아갔다. 밤이면 황홀했던 내면의 욕망이 수치심으로 돌아와 그를 괴롭게 했다. 매일 아침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