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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인간

완전한 육체

by 안이서

에너지체를 육체화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우주의 에너지를 모아 응축시켜 육체를 만들어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몸은 투명해졌다. 일 년 정도 연습을 한 후에야 몸에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동시에 다른 일도 함께 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인간과 똑같은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몽정까지도! (얼마나 당황했던지…….)


강률은 3년 동안 가꾼 농장 한 가운데 있었다. 6개월 전에 심었던 씨앗이 이제 열매를 맺었다. 길면서도 통통한 모양에 초록색이 바탕인데, 오렌지색 줄무늬가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져 있다. 강률은 쭈그리고 앉아 열매를 따며 생각했다.

‘이 열매는 뭐라고 부를까?’

한 입 깨물었다. 껍질을 물면 안에서 달콤한 과즙이 터지며 아삭한 속살이 씹힌다. 고추? 사과? 배? 매일 어려운 숙제가 강률에게 떨어졌다. 지구에서 사용했던 단어를 이 행성의 생명체에 입히는 것이 그나마 쉬운 일이었다.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것도 힘들었고, 그 단어를 기억하는 건 더 힘들었다.

“아갸, 이걸 뭐라고 부를까?”

강률은 자기 옆에 똑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앉은 유인원에게 물었다. 그녀와 함께 한 지도 4년이 넘었다. 강률은 그녀에게 ‘아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중 ‘아갸’라는 의성어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기야’라고 엄마가 ‘아기야’라고 부르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해서 괜찮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보호하는 아갸는 강률을 의지하며 따랐다. 그가 웃으면 아갸도 웃었고, 한숨을 쉬면 똑같이 흉내 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아갸도 함께 바라보았다.

아갸는 강률의 고민을 함께 나누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에갸갸으갸갸.”

강률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숙제를 끝냈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고추사과라고 부를 거야.”

아갸도 같이 환하게 웃었다. 아갸는 강률의 얼굴만 보면 그냥 웃음이 나왔다.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그런 표정이랄까? 강률도 아갸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아기가 엄마, 아빠와 눈이 마주칠 때 나오는 순수 그 자체의 표정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갸는 인간으로 치면 십대 초반이었던 것 같았다. 키가 커 가면서 몸에 굴곡도 잡히고 가슴도 커졌다. 이 유인원종은 몸에 털이 있기는 하지만 촘촘하지 않고 성글어서 알몸이 그대로 보였다. 강률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눈을 감고 다니던지, 아갸의 몸을 가리던지 해야만 했다. 그래서 옷도 만들어 입혔다. 식물 줄기를 부드럽게 치대고 엮어서 천을 만들었다. 그 전에 나무를 깎아 베틀을 만들어야만 했다. 에너지체로 있을 때 가장 좋은 점은 정보가 필요할 때 바로바로 수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몸에 옷을 입히고 나서야, 강률은 마음 깊은 곳에 걸쳐 있던 불편함이 사라졌다. 그것은 단순한 시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녀를 인간처럼 존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들도 진화를 할 것이다. 아갸가 속한 유인원종이 미래에 문화를 창조하는 인류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고나 할까?


강률이 필요한 정보는 우주에서 얻을 수 있었지만 노바리스 에테리아에 속한 것들의 정보는 몸소 알아내야만 했다. 우주에 있는 정보는 이미 저장된 것들이다. 노바리스 에테리아의 모든 것은 이제부터 저장될 정보들이다.

강률은 식물의 열매를 하나씩 직접 먹어보았다.

떫은 것, 매운 것, 달달한 것, 심심한 것…….

눈에 좋은 것, 코에 좋은 것, 염증에 좋은 것, 목에 좋은 것,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것, 반드시 죽는 것……

직접 경험하면서 우주에 정보를 입력해 갔다. 그 과정에서 강률은 인간이 우주에서 얼마나 큰 존재인지 깨닫기도 했다. 논리적인 의식이 우주에 풍부한 정보를 줄 수 있다. 인간의 생각 자체가 창조였다. 인간은 우주의 에너지 디자이너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신의 옷. 인간의 생각, 감정, 행동 모든 것은 자기 안의 신을 꾸미는 옷이다.

노바리스 에테리아의 인간들은 신의 옷을 검게 물들였다.


에너지가 생각에 지나치게 몰두한 순간 손끝부터 희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무거워지면서, 강률은 자신이 다시 에너지로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강률은 생각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을 떨쳐낸 후 자신이 이 땅에 이루어 놓은 결과들에 시선을 돌렸다. 오두막집 뒤로 울창한 산이 배경을 이루고, 집 앞으로는 수많은 종류의 식물이 심어진 밭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집 앞에는 우물도 파 놓았다. 이 모든 것을 이루며 강률은 노바리스 에테리아의 척척박사가 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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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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