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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추락

말리카2

by 안이서

말리카의 10대는 열렬한 사랑의 열병으로 시작됐다.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나다니엘’ 너무도 화려한 세계에 속한 사람. 시골 변두리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10여 년을 살고 있는 촌뜨기 소녀를 천상의 세계로 인도해 줄 존재였다. 그녀의 화장대 옆에는 예쁜 소녀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는 나다니엘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눈 화장을 하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면 말리카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자기야, 내가 그렇게 예뻐?”

나다니엘은 관능적인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겉모습이 아무리 번지르르 해도 실제로는 할아버지야, 징그럽지도 않니?”

친구들이 밉살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지적을 하면 말리카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난 내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해. 그의 외모, 돈, 명예, 권력. 그가 가진 모든 게 너무 아름답잖아?”

말리카는 뛰어난 미모만큼이나 머리 회전도 빨랐다. 연예계로 진출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예쁜이들이 발에 차이는 곳이다. 운이 좋게 나다니엘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눈에 띄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말리카는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나다니엘이 운영하는 우주항공 연구소 연구원이 됐다.

처음 나다니엘을 본 날, 노르아드레날린이 뿜뿜 쏟아지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나다니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순진해 보였던 것이다.


과거의 일이 말리카의 허락도 없이 기억나고 말았다. 그녀를 본 나다니엘이 첫눈에 반해 허둥댔어야 했는데……. ‘아, 짜증나.’ 결혼 생활이 그렇게 끝나지만 않았어도 짜증까지 날 일은 아닐 것이다. 일단 풀려버린 과거의 기억은 그 후의 일들도 질질 끌고 왔다.


말리카가 임신 한 후 나다니엘은 태교에 집중해야 한다며 다른 침실을 썼다. 말리카의 입장에서는 ‘이게 뭔 개똥같은 소리지?’라고 생각했지만, 딴 방을 쓸 수는 없다고 말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지낸 지 며칠이 지나자 그녀의 마음에 의심이 올라왔다.

‘혹시 딴 년 생긴 거 아냐?’

그래서 그가 묵는 방으로 갔다. 문틈으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깨 있는 것 같았다.

“나다니엘? 자기야, 자?”

조용히 문을 열고 안을 살피니 나다니엘은 책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근육은 굳어 있었지만, 애잔하기 그지없는 두 눈에 눈물까지 그렁거렸다. 웬만해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남자가 열여섯 살 소년 같이 느껴졌다. 말리카는 조용히 그의 옆으로 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기야, 무슨 일 있어?”

말리카는 화면을 확인했다. 나다니엘의 감성을 자극한 것이 무엇인지……, 작달만한 동양인 아줌마가 대중을 향해 뭐라고 말하는 영상이었다. 나다니엘은 요즘 영성가를 찾고 있는 중이었는데, 저 여자의 강의가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말리카는 나다니엘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됐다. 화면 속 여자 말고는 그에게 다른 세상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여자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말리카.”

“응? 무슨 일이야? 나한테 말해 봐, 자기야.”

“말리카……, 미안해.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농담이라 생각하기엔 그 여자를 바라보는 두 눈이 너무도 순수하고 진실 돼 보였다.


말리카는 생각을 떨쳐버리려 화장대에 앉아 자신의 얼굴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런데도 기억은 또 스멀스멀 끼어든다. 말리카는 나다니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였다는 안이서가 가장 가식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회개? 도대체 회개할 게 뭐가 있지? 내가 살인을 했어, 거짓말을 했어? 나는 돈을 사랑해, 예쁜 나를 사랑해, 섹스가 좋아. 이렇게 솔직한 게 죄야? 욕망대로 사는 게 왜 나빠?’

나다니엘이 뭐에 씌여 그 여자에게 가 버린 건지 모르겠다. 결국 죽고 말았지 않은가? 충격에 하얗게 질려서. 늙어 볼 품 없는 나다니엘의 몰골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기절할 뻔했었다.

나다니엘을 안이서에게 빼앗겼으니, 그 여자의 제자인 강률을 뺏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었다. 비록 몸이 없어 육체적인 즐거움은 누리지 못한다 해도, 그의 마음을 얻는 기쁨 정도는 누려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요?”

그가 되물었다.

“당신에게 육체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요. 나는 그것을 볼 수 있고요. 그래서 사랑해요.”

강률은 말리카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곧 그는 먼 곳의 시선을 거두어 말리카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도대체 무언가요?”

“음……, 인류애?”

강률은 그 대답을 비웃었다. 그가 이곳의 인간들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은 개가 봐도 느낄 것이다. 강률은 말했다.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헛소리 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가 봅니다. 당신이 나를 왜 원하는 건지 잠깐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당신과 잠자리를 갖지 않은 남자는 유일하게 나 혼자인가 싶네요.”

그리고 자리를 뜨려는 강률에게 말리카는 다급하게 말했다.

“왜 사람의 진심을 삐딱하게 받아들여요? 혹시 당신의 욕망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마음에 병이 든 거예요?”

말리카는 아픈 사랑 앞에 선 줄리엣 같은 표정으로 강률의 에너지체 위로 자신의 손길을 스쳤다. ‘만질 수도 없는 남자와의 사랑이라니……, 쯧쯧쯧.’ 신파적인 생각까지 곁들였다. 강률은 한숨을 쉬었다.

“진심? 당신한테 진심이란 게 있어요? 사랑이 뭔지는 알고 하는 말이에요? 나는 당신한테 진실성이나 선함은 손톱만큼도 볼 수가 없어요. 나한테 무슨 의도로 접근한 건지 이제 알겠네요. 내 스승님한테 복수하려고 그런 거잖아요. 당신의 든든한 배경인 나다니엘을 내 스승님한테 뺏겼다는 원망 때문에.”

말리카는 강률이 원하는 정보를 바로바로 우주에서 수신 받을 수 있다는 걸 모른다.

하여간, 그래서 그랬다. 강률의 옆에서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한 것. 강률에게 큰 엿을 먹이고 싶어서 그랬었다. 그 엿이 제대로 먹혔는지 그 후로 유령처럼 떠다니는 재수 없는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영생의 추락


도리안은 에덴스아크의 생명,질병연구소장이다. 좀 더 친근하게 표현하자면 가정의학과 의사이다. 늘 그렇듯 그날 아침도 도리안은 소변이 마려워 깼다. 몇 개월 전이라면 화장실에 갔다가 바로 씻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일을 보고 다시 어기적 이불 속으로 들어와 짧은 쪽잠을 청했다. 몸이 가볍지 않은 느낌. 찌뿌둥한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는 돌덩이처럼 무겁고, 아침마다 손가락 관절이 부풀어 있었다. 몇 개월이나 지나서야 도리안은 자신의 몸 상태에 의문이 들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도리안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진료소 옆에 딸린 연구실로 들어가 바로 자신의 말초혈액을 채취했다. 말초혈액에서 핵DNA를 분리 후 서던 블롯 방법으로 텔로미어의 길이를 확인했다. 새 지구에 도착했을 때 기록했던 자신의 텔로미어 길이와 비교가 필요하다. 텔로미어의 길이는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도리안은 마치 이 행성 전체가 한순간에 진공 상태가 된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귀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도리안은 어쩌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간호사 린다의 다크 서클을 놀렸던 게 떠오른 것이다.

“지난 밤 엄청 화끈하게 보냈나봐? 근사한 남자라도 발견했어?”

새로 발견할 수 있는 근사한 남자 따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놀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다크 서클은 짙었다.

“난 광란의 밤은 일 년 전에 졸업했어. 요즘 하는 것도 없이 피곤해.”

하는 것도 없이 피곤하다는 말, 도리안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런…….’

충격이 몸 안의 에너지를 싹 말려버린 것처럼 그는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도리안은 구석의 소파로 비틀비틀 걸어가 풀썩 주저앉았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 결과가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

‘난 늙었어. 갑자기. 폭싹.’

혼자만의 문제라도 서러울 것인데, 만약 새 지구에 이주한 모든 인간들의 문제라면…, 이건 재앙이다. 우주를 건너오는 동안 인간들은 출산의 기능을 잃었다. 그 때 태어난 아이들은 겨우 열세 명에 불과했다. 도리안은 아마 우주 방사능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엄청난 문제로 여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영원히 살 존재라 후대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때 밖에서 진료실 쪽의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린다인 줄 알았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열었어. 어떻게 하지? 상처가 꽤 깊은 것 같은데?”

에릭의 목소리였다. 근처에서 통증을 참는 신음 소리도 들렸다. 탐험을 나갔다가 다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금도 그런 상황인가 보다. 도리안은 인류에게 닥친 거대한 문제는 일단 미뤄두고 밖으로 나갔다.

진료실 벽에 기대 서 있는 야미가 보였다. 그리고 아래 흥건한 피가 흰색의 배경과 대비를 이뤄 피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실감나게 보였다. 이렇게 큰 사고는 도리안에겐 처음이었다. 심장이 쿵쾅 거릴 정도로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도리안이 다급하게 물었다. 손으로는 잠긴 진료실 문을 열고 눈으로는 야미의 상처를 확인했다. 오른쪽 옆구리에 깊이 찔린 듯한 상처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야미를 침대에 눕혔을 때 세라이아가 들어왔다. 과다 출혈로 쇼크 상태에 빠지는 야미를 보았고,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세라이아를 보는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에릭은 눈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우리가 밖에서 한 행위들은 비밀이야. 알았지?’

도리안은 야미의 호흡을 확인하며 말했다.

“린다, 여기 압박 좀 해줘.”

세라이아는 자리에 없는 린다 대신 압박 드레싱을 찾으며 말했다.

“린다는 아프데요. 나한테 대신 근무해 달라고 청하더라고요. 근데 도리안, 압박 드레싱은 어디에 있을까요?”

도리안은 물품 창고에서 압박 드레싱을 찾으며 생각했다.

‘오늘 따라 사건 사고가 많지? 불안하게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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