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 YMCA gym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회사 전화기에서 내 이름을 찾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사실을. 이름은 있지만 이름이 불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꽃에 이름을 붙여준다던 김춘수 시인의 낭만을 거스르는 걸까.
낯선 여행자로서 캐나다에서 달리는 조깅 트랙은 내게 묘한 해방감을 줬다. 준비운동으로 5바퀴를 도는 동안 마주치는 헬스장 고인 물들과 눈인사와 손 인사를 건네도 그 누구도 나를 불러 세우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어디 출신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트랙을 생글생글 달리는 사람이란 느슨한 연대감만 있을 뿐이니까.
그때 나는 익명성이 자유로움과 동의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쫄쫄이 레깅스를 입든, 뱃살이 흘러내리든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 백인, 흑인, 동양인이 뒤섞여 각자의 운동을 하는 이곳에서 특정한 기준치로 상대의 몸을 재단하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으니까. 이러한 자유가 사랑스러운 건, 그러한 자유를 누리지 못해서였을까?
문득, 회사미팅이 떠오른다. 허리선이 잘록 들어간 블라우스와 치마를 불편하게 차려입었던 날.
“너는 똥배가 왜 그렇게 불룩 나왔니 허허”라고 실없는 농담의 화살을 던지는 상사에게 나는 어설픈 미소만 지어 보였을 뿐
‘너나 잘하세요! 내가 뭘 입든 무슨 상관이세요’라고 대꾸하지 못했던 건 오랫동안 마음 한편을 쓰라리게 했다. 그러니 어떤가? 익명이 주는 자유로움에 기대어 나의 뱃살을 마음껏 드러내도 아래위로 쳐다볼 사람 없는 이곳에서, 살을 출렁이며 쨍한 옷을 입고 운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준비운동으로 마지막 바퀴를 돌고 트랙을 빠져나오니 트레이너 A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오늘 수요일이니까 웨이트 하고 줌바 그룹 수업도 들을 거지? 근데 오늘 줌바 강사가 다쳐서 수업이 취소됐어. 너에게 알려주려고 찡긋.”
이곳 헬스장엔 매일 다양한 GX(그룹 수업)가 있는지라 웨이트를 마치고 줌바, 요가 같은 그룹 운동까지 한다. 직원 뺨치는 꾸준한 내 규칙성 덕에 나의 동선을 누구보다 잘 아는 트레이너 A는 특유의 산타 같은 인자한 미소를 남기고 총총 사라져 갔다.
특정 감각이 약해지면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보상 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시력을 잃으면 청각이 예민해지고, 청각이 약해지면 촉각이 더 발달한다고 한다. 나 또한 약한 언어능력 대신 신체 감각이 더 예민해지고 있는 걸까?
영어와 불어를 콤보로 배우느라 과부하가 걸린 뇌는 헬스장만 들어서면 자연스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운동에는 말이 필요 없다. 음악에 맞춰 함께 발맞춰 뛰고, 땀을 흘리다 보면 그것이 순간의 언어, 즉 의사소통이 된다. 한국어로 속 시원히 수다를 떠는 게 불가능한 파란 눈의 외국인들 사이에서, 오히려 아무 말 없이도 함께 땀 흘리는 시간은 완벽한 교감의 순간이 되었다.
낯선 도시에 내 땀의 흔적을 차곡차곡 남기는 것. 그것이 결국, 이방인으로서 나를 지탱하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으며 오늘의 운동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