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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스테라 May 03. 2022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코로나부터 출가까지



생활비 카드 없이 오래 버티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상황에서 집을 제공해주던 친구는 코로나에 걸렸고, 

나도 따라서 감염되어 본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에게 100m 이내 접근 금지 임시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의 집은 꽤 조용하고 아늑했다.

반지하 원룸에서 방 세 개짜리의 25층 아파트로 돌아오니 마음은 불편해도 몸은 편안했다. 

코로나에 감염된 나는 퀸 사이즈의 침대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재택근무를 하다가, 책을 읽다가, 넷플릭스를 보다가, 건네주는 밥을 먹으며 꽤 부유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집에 아빠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밥에 관한 대화 외에는 일절 하지 않았다. 

점점 마음이 더 불편해져 왔다. 




침대 생활에 익숙해져 갈 때쯤에 격리는 해제되었다.

이제 집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일주일 동안 집안에만 있었던 나를 위해 망원동을 걸어 다니며 혼자만의 여유를 즐겼다. 

그다음 날은 친구를 만나 석촌호수에서 봄볕을 맞으며 사람들 속에서 안전감을 느꼈다.

내가 지키려던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날 밤, 아빠는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거실로 불러냈다.

'집에서 나가줘야겠다'




그 한 마디의 말로 나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정을 깨뜨린 당사자.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될 것을 괜히 신고해서 복잡한 일을 만든 문제아.

부모에게 나는 그런 존재였다. 

더는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집은 사건 장소이자 2차 가해의 장소였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했던 강아지와의 기약 없는 이별을 준비하는 밤은 슬프고 아팠다. 

강아지도 사정을 아는 건지 새벽 내내 소리 없이 우는 나의 눈물을 핥아주며 같이 밤을 지새웠다. 




세 시간도 자지 못한 채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난 나는 급하게 짐을 쌌다. 

집을 제공해줬던 친구가 자신의 집에 짐을 옮겨주겠다며 편하게 출근하라고 도와줬다. 

짐을 싸는 나를 말리던 엄마는 아빠에게 사과하면 안 되냐고 했고, 

사과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싸던 짐을 마무리하고 말없이 집을 나섰다. 

출근 한 시간 전에 집을 나온 나는 짐을 옮겨주러 온 친구와 만나 서로 기대 말없이 위로를 나누었고 

우리는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애써 모른척하며 잘한 선택이라고 되뇌었다. 




또다시 출근하는 아침이 돌아왔다. 

회사에서만큼은 일상이 유지되고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퇴근 후의 내 집은 곧 친구의 집이었다. 




친구를 부둥켜안고 오랜 시간 울었다. 

친구는 나를 잃을까 봐 두려워했고, 나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본가를 나온 선택은 다시 생각해도 옳은 일이었다. 


나는 그 집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집을 나온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엄마에게 장문의 카톡을 남기고 애써 잠을 청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가 누구의 엄마, 아내가 아닌 인간 (이름)으로 살길 바랬어. 그래서 나는 싸웠던거야. 하루종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엄마를 하루종일 놀았으면서 뭘 힘들어하냐고 폄하하는 아빠랑, 자기가 입을 옷은 자기가 챙겨 입길 바랬던거고,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치우길 바랬던거고, 엄마가 아빠 일을 도와주는 만큼 아빠도 집안일을 도와주길 바랬던거야. 엄마는 요리랑 빨래, 청소에 재능 없어. 대신에 공부를 잘하지. 그래서 나는 엄마가 책 읽는 게 좋았고, 부동산 공부를 하는 게 좋았고, 새벽에 수영 다니던 게 더 멋지다고 생각했어. 그게 (이름)이라고 생각했거든. 이건 (이름)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우러러 나온 응원이자 싸움이었어.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건 엄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엄마의 모습이 곧 나의 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답답했을지도 몰라.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빠를 남자로, 엄마를 여자로 봤다고 했지만 그 말은 애초에 틀렸어. 태어나면서 부터 우리는 남자와 여자였고 순종적으로 살아가게 길러졌어. 엄마의 선택이 그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이었다는 건 잘 알아. 근데 나는 그렇게 못살겠어. 아무런 준비도 지원도 없이 집에서 나가라고 한 건 더이상 내 불행에 관심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내 곁에는 이제 기꺼이 집을 내어줄 친구와 아빠가 카드를 정지했을 때 돈을 내어주는 언니와 목을 졸리고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출근했을 때 먼저 점심을 사주시겠다는 회사 선배와 생필품이라도 챙겨 주겠다는 친구들이 있어서 외롭지가 않아.


예전에 나에게 설거지를 시키지 말라고 장문의 편지를 쓴 적이 있었지. 엄마는 없었던 일처럼 무시했었고. 그 때 나는 더이상 내 진심을 표현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어. 얼마 전에 친구가 그러더라. 나는 내가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도, 그걸 남에게 이야기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렇게 둔감하게 살기 싫어. 사랑하면 사랑한다, 싫으면 싫다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싶어. 근데 엄마아빠랑 있으면 그게 안돼. 나는 사는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생각하는대로 사는 사람이고 싶어. 그래서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어. 아프지 말고 잘있어.



출근 시간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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