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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블루밍 Nov 05. 2021

예비 신부의 이중생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서 든 생각


지난밤 당직을 섰다. 새벽 다섯 시부터 네 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아침 일찍 드레스샵으로 향했다. 촬영 가봉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촬영 가봉이란 웨딩촬영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일이다.) 굳이 아침 10시에 피곤함이 가득한 눈으로 샵을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신문에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많이 안 해서 문제라고 하지만, 막상 결혼을 준비하다 보면 상견례 장소를 예약하는 일부터 경쟁이 시작된다. 웨딩홀 투어, 본식 스냅, 본식 DVD, 드레스 투어, 촬영 가봉, 스튜디오 촬영, 헤어&메이크업샵 등등. 괜찮은 날짜, 괜찮은 장소, 괜찮은 가격에 모든 게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발 빠른 예약이 필수다. 그러니 예비 신혼이라면 여유로운 태도는 잠시 뒤로 빼놓는 게 좋을 것이다. 같은 돈을 쓰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하는 것만큼 속상한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지난번 드레스 투어 때도 느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는 일은 생각보다 신이 난다. 평소 무덤덤한 성격인 나도 순백의 드레스 앞에서는 천상 女子가 된다. 고가의 옷을 샵매니저들의 도움 하에 입다 보면 왠지 내가 이 시공간의 주인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드레스를 대여섯 벌씩 입으면서 거울을 보고 예랑이로부터 사진도 찍힌다. 찰칵찰칵. 오, 이거 예쁜데?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밤새 당직을 서면서 비염에 골골 대던 내가 이렇게 비싼 옷을 입고 단상에 올라와 있다니. 카메라를 포함해 샵에 있는 네 쌍의 눈이 다 나를 향해 있는 상황이 어색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톱니바퀴의 부품에 불과했던 내 역할이 주인공으로 바뀌었으니 그러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연예인들은 유명 드레스샵의 옷을 시상식이나 여러 행사에서 흔히 입겠지만 나 같은 직장인은 결혼이라는 빅 이벤트를 치러야만 입게 된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딱히 명분도 없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대개 그렇다. 내가 대놓고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반나절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니, 사실은 반나절로도 부족할 것 같다. 오롯이 하루 종일 진짜 나로 살고 싶다. 그래 봤자 끝이 정해져 있는 삶인데, 내 인생 나로 좀 살아보겠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바람일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내가 단지 그 여정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진짜 나로 사는 일. 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작가의 서랍을 채우려고 하는 이유다. 브런치는 '나'를 담는 그릇이다. 끄적끄적 글을 적어나가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나게 해 준다. 브런치라는 이름만큼 머물수록 참 달콤한 공간이다, 이곳은.      






드레스를 입고 나서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무겁다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결코 입을 수 없는 옷을 입으면서 결혼의 막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누군가가 드레스를 당겨 지퍼를 올려줘야 하고, 누군가는 내 가운을 받아 옮겨줘야 한다. 드레스에 어울리는 부케도 찾아 가져다줘야 한다. 웨딩드레스를 입고선 움직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결혼식장에서 드레스나 베일을 정리해주는 헬퍼 이모를 한 번쯤 본 적이 있다면, 드레스가 얼마나 까다로운 옷인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혼자 입을 수 없는 웨딩드레스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새로운 가족을 만들게 되는 결혼이라는 이벤트. 결혼식 날 웨딩드레스를 입기 시작한 건 이런 관계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평소보다 큰돈을 쓰게 되고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되는 결혼식. 스몰웨딩도 많이들 한다지만 막상 결혼이 내 이벤트로 다가오면 언제 이런 걸 해보겠나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과하게 공을 들여 후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이미 한 번 경험했기에 그런 후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 길을 아직 가보지 않은 사람은 '직접 가보고 후회하는 것'과 '안 가고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다. 어떤 여정을 선택할지, 어떤 후회를 선택할지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과 웨딩드레스를 입는 예비 신부의 삶. 이 이중생활의 온도차는 좁혀질 생각이 없는 듯 보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내가 주인공으로 사는 일상에 점점 익숙해져 보려고 한다. '진짜 나'로만 살아갈 나중을 위해 미리 연습하는 셈 치고 말이다. 공개적으로 내가 주인공인 나의 결혼식. 나처럼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신혼이라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진짜 나'를 드러내면서 결혼 준비를 하면 좋겠다. 내가 힘주고 싶은 부분은 과감하게 지출하고,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부분은 소박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적어도 결혼만큼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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