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매번 자살하고 싶은 걸까

조울증과 불안의 환장의 콜라보레이션

by 고 임리

— 조울증과 불안형 애착이 만든 '리액션만 하는 삶'의 비극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실을 듣고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나는 머리가 크고 나서 열세 살 때부터 자살을 꿈꿨는데. 자살이 도피처나 결론이 아닌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그런 삶에 대해 최초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삶에 대한 엄청난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죽음이나 아픔에 대해서도 초연한 듯 보였다. 사는 동안 성공을 하고, 최대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 상대가 원하는 걸 빠르게 파악하고, 주고받는 것에 능숙한 사람들.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외모에, 밝고 행복해 보여 모든 빛이 그들에게 향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앞날은 꽃길만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런 '에너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게 바로 나 같은 사람일 것이다. 이 환하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나만은 그런 에너지가 없어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이 세상이 주는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두 거절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불안은 나를 잠식했다


내가 조울증이라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상세불명의 불안이었다. 그게 나의 두 번째 병이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왜 이렇게 덜덜 떨게 되었는지. 왜 시험 보는 것을 싫어했는지. 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는 건지.

사실 모든 사람들이 시험이나 성과, 인간관계에서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특히 인간관계가 문제였다. 나는 불안형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과할 정도로 남에게 내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다. 밥을 사고 사소한 선물을 잘 주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근원이 무엇일까. 타인이 나를 떠날까 봐, 타인을 통제하고 잡아두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원인 역시 나의 불안이었다.


나는 내가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남들도 내가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정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떠날까 봐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그들과 있을 때 나는 나답지 않게 대체로 맞춰주었다. 내 머릿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도, 그걸 굳이 말하기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할수록 나는 불안해져 갔다. 외로움을 깨려 사람들을 만나려고 연애를 시작한 건데, 연애를 할수록 나는 불행해졌다.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며 고통받았다. 다들 행복해지려고 사람을 만나는데, 나는 해야 하니까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조울증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과 생각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다.


불안형 애착 유형의 아기들은 어릴 때부터 엄마가 힘들어 보이면 오히려 밥을 떠먹여 주면서 불안을 잠식시키려고 한다고 한다. 보호자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결국 내면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어른아이'가 되는 사람들. 그게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내가 조울증과 불안증 약을 먹기 전에는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잘하려고 했다. 물론 부자가 아니라 퍼주진 못했지만, 부자였다면 아마 다 퍼줬을 것이다. 집안일도 내가 다 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웬만하면 따르며 그들을 배려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들 앞에서 죽고 싶다고도 이야기하고, 나를 싫어하든 말든 내 성질을 부린다.


물론 나도 조울증일 때 힘들면 그들에게 화를 냈지만, 그건 벼랑 끝에 몰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액션에 대한 리액션만 했던 거다. 내 삶은 대체로 리액션만 하는 삶이었고, 나는 스스로 '왜 액션을 할 수 없지?'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제 다 깨닫게 되었다. 이건 조울증과 불안증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비극이었다는 것. 내가 애초에 감당할 수 없었던 짐을 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연애로 불안의 탈출구를 찾아보다



많은 연애가 나에게 준 교훈은 나의 취약점을 발견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완전히 이 차가운 세상에서 너무나도 계산적이지 않고 무해하며, 오히려 비참하게도 순진한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성장이 안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인간관계나 가족, 지인 관계는 참거나 피하면 그만이지만, 연애는 어제까지 달콤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경험해야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차단까지 당하면서. 나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더욱이 나는 회피형을 자주 만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들의 처음 친절함과 자신만만함이 나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그리고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물론 그건 잘 안 된다.)


연애는 결국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나의 불안감, 나의 통제성, 나의 순진함을 모두 발견하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나의 애증 관계인 부모가 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 많은 연애 끝에 나는 감정적으로 부모와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엄청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전에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실까 봐 이유도 없이 그들의 장거리 출장을 따라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연애를 하는 동안 너무 불안하다. 사실 그렇게 바뀐 것은 없다. 그저 좀 더 편안해지고 능숙해질 뿐이지. 나는 그저 나이고, 타인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받고 불안하고 감정적이며, 이성적인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가 된다. 이 '짓거리'를 계속해야 하는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려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외로운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과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왜 그 고통의 길을 걷고 싶은 걸까. 내가 너무 순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조울증과 불안증, 갑상선암으로 이룬 것이 없어 자존감이 낮아서일까?


나도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자살하고 싶은 마음은 결국 외롭고 불안하기에 생기는 것 같다. 누군가와 있어서 오히려 텅 빈 느낌이 든다는 것. 분명 친절하고 나에게 잘해주지만 나는 그의 조금의 무관심으로도 엄청나게 자아가 흔들린다는 것.


결국 그 불안이 죽음의 아우토반이 된다는 것. 그 불안을 멈춰야 할 테지만 그 방법을 알 수가 없다. 그저 글을 쓰는 것. 글을 쓰는 것은 무엇인가를 통제한다는 것이기에. 불안의 불꽃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가 아니다. 근원의 불안은 조울증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그건 타인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나만이 그 답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었다.

이전 10화내가 북 치고 장구 치는 동안 세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