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목소리, 얼어붙은 차 안
"이제 너도 30이 넘었다. 언제까지 돈 필요할 때마다 아빠가 도와줘야 하냐."
가족끼리 차를 타고 밥 먹으러 가는 길, 조수석에 앉은 아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다. 그 한마디가 차 안에 가득했던 평화로운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묵직한 침묵 속에서 나는 그저 창밖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번에 OO 둘째 딸 결혼하잖아. 그리고 2주 뒤엔 OO이 딸도 결혼하고."라며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담담히 이어가셨다. 그러다 엄마는 '너네도 안정적인 직업 가진 사람이랑 결혼해야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은 아빠의 말과 함께 내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다 나와 동생이 앉은 뒷좌석을 향해 아빠가 고개를 돌리시며 다시 한번 그 말을 던지셨다.
그 물음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답답해서 한 말이겠지만, 내 귀에는 '언제까지 알바만 하고 살 거냐'는, 비수 같은 소리로 들렸다. 늘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내 힘으로 해결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더욱더 깊은 자책감과 무능력한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서른이 넘도록 여전히 부모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주변에선 하나둘 결혼 소식을 전해오는데, 나는 아직도 다음 달 대출 이자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그다음엔 열등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남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마음.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뭔가를 증명하고 싶은 조급함. 분명 아빠 친구들 사이에서 "너네 딸은 무슨 일 해?"라는 대화가 오갈 게 뻔했고,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져 나를 괴롭혔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른 돈을 많이 벌어서 온전히 '1인분의 몫'을 해내야겠다는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빠에게 빚진 것을 하루빨리 갚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일 당장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서 정규직이라도 알아보자.' 그런 결심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동시에 깊은 회의감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끝없이 방황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현실을 너무 모르는 걸까? 그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혼란스러웠다.
가장 괴로운 건 내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갈등이었다. 사실 나도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었다. 매달 일정한 월급이 들어오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직업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삶. 하지만 동시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 일, 이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과연 어떤 길이 정답인지, 그 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이 안정적인 직업을 말씀하시는 건 나를 걱정해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점점 삶은 팍팍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나이 들어서도 불안정한 삶을 살까 봐, 힘든 시간을 겪을까 봐 하시는 말씀이라는 걸.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더 작아지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들이 모두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바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꿈을 향해 준비하고 있는데, 그런 시간들이 모두 '그냥 놀고 있는 시간'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부모님의 걱정 어린 시선이 때로는 나를 더욱 주눅 들게 했다.
어쩌면 부모님 세대와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안정'의 의미가 다른 건 아닐까. 부모님 세대에서는 정규직이 곧 안정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정규직도 더 이상 영원한 안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지금도 가끔 그런 말을 들으면 여전히 주눅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나 자신을 자책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만의 속도대로, 나만의 길을 찾아 걷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