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쩍 할머니 손에 컸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큰 복이었다. 그것도 민간신앙과 불교와 기복신앙을 두루 믿고 행동하는 할머니랑 같이 살아 절기마다 얻어먹고 체험하고 문득 스치듯 기억나는 추억이 많은 행복한 어른이 된 것이다.
동지 때 팥죽은 엄청 많이 끓여 두고두고 먹어서 맛있다는 생각보다 먹어 치워야 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분명 뜨끈하게 동치미 무와 함께 맛나게 먹었을 텐데 그 기억은 어디 가고 뻑뻑한 죽 한 그릇에 떨어지지 않는 새알심을 무쇠솥에 중탕으로 데워주신 할머니가 먼저 생각이 나는 음식이다.
동지 밤에 할머니 따라 죽그릇을 들고 정재 벽에 화장실에 장독대에 팥죽을 뿌렸다. 그르고는 물 한 그릇 떠놓고 기도하시는 할머니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우스개로 소쿠리 걸어두면 밤사이 귀신이랑 도깨비가 왔다가 구멍 세다 날이 밝아 도망간다는 얘기를 산타할아버지 보다 더 오래 믿었었다.
며칠 뒤면 동지인데 평일이고 그냥 쉽게 살 수 있는 팥죽 한 그릇에 내 추억을 곱씹으려니 괜히 미안해 묵은 팥을 세 컵 덜어 씻어 앉혔다. 여느 때보다 잘 삶긴 팥에 고마운 건 오버 같지만 일을 하려고 시작했는데 술술 풀리면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설거지 귀찮아 팥을 믹서에 갈지 않고 으깨서 앙금을 내리고 사다 놓은 새알심이랑 소금 설탕 한술 식은 찰밥으로 그럴싸한 팥죽 한 그릇을 만들었다.
새알심 한알에 할머니 생각 또한 알에 엄마 생각 또 한알에 그릇 들고 심부름 가던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절기마다 먹는 거 하나에 요런 저런 얘기 잔뜩 만들어준 할머니도 그립고 한해 더해질수록 챙겨서 만들고 먹는 내가 더 우습기도 하다. 동지 팥죽 새알심 먹고 한 살 더 두둑이 챙겨으니 또 다른 추억 속으로 사부작 움직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