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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성 Dec 08. 2022

당신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줄께요

힙합과 코디미가 다반사인 중년 부부의 흔한 일상?

“당신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줄께요~ 연기와 노래, 코미디까지 다해줄게~ 언제나 처음 같은 마음으로... 난 당신의 연예인!”      


십년만 젊었어도 아마 나는 5년전 내 결혼식 피로연에서 남편을 위해 싸이의 ‘연예인’을 불러줬을 것이다. 실제 요즘 청춘들 결혼식에서 춤이나 노래가 좀 되는 신랑들이 결혼식 이벤트로 많이 하는 듯한데, 세월이 야속하게도 나는 이제 그 긴 랩을 외워서 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 하객들 앞에서 이 노래를 남편에게 들려주지 못한, 나이든 내가 아쉽다. 노래 가사처럼 연기와 노래, 코미디까지 뭐든 다해주면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청춘 스타일로(?) 성혼맹세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후 5년.

비록 ‘연예인’ 노래는 아직도 소화 못하지만, 대신 폴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 해~ 여보씨~’ 하며 발라드 사랑 노래를 약간의 코믹 추임새를 넣으며 불러주고, 쇼미더머니를 보다가 나오는 비트에 맞춰 아주 짧은 랩으로나마 사랑고백 랩을 해주기도 한다. 랩이라기 보다는 거의 타령에 가깝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어느 정도 연기와 노래, 코미디를 단 한명의 관객인 남편 앞에서 종종 해주고 산다 이 나이에... 뭐 특별한 퍼포먼스도 아니고 완전 프리스타일 즉흥 퍼포먼스지만, 꽤나 우스꽝스러운지 남편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아무리 봐도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아. 당신은 개그우먼이 됐어야 하는데 말야. 당신이 개그우먼이 됐더라면 박미선급 정도는 됐을 것 같은데.... 정말 아쉽네!”      


여러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남편은 정말로 아내가 개그맨이 아닌 것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 사실 나는 고교시절 오락부장 출신이다. 코미디물도 시나리오를 써서 직접 연출하고 군무도 직접 짜서 학우들과 일년에 한번씩 열리던 학교 예술제에 올리곤 했다. 지금 세대들이야 모두가 연예인급 노래와 춤, 끼가 있는 세대지만 그때는 이런 유형이 정말 드물어서 나같은 유형은 좀 튀는 형이었는데, 지금처럼 개그맨의 위상이 높은 시절이었더라면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개그맨의 위상이 지금과는 달리 현저히 낮았고 연예인이 되는 통로도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너무 정보도 제한적이었다. 방송채널도 공중파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 전주에 사는 내가 상경해서 개그맨 시험에 응시하는 일은 너무도 머나먼 일이었다.      


그후 참 안풀리던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흑역사 시절을 관통하며 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내 유머 감각은 '용불용설' 이론에 따라 거의 퇴화되다시피 했다. 특히 혼자서 오롯이 책상에 앉아 엉덩이와 의자가 하나가 되어야 가능할까 말까한 공부의 세계에 심하게 늦깎이로 입문한 후부터는 더욱 입 닫고 혼자 되는 고립을 자처해야 하는 삶을 살면서 내 유쾌발랄함은 비판적 운둔형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실제로 몇년전에 MBTI와 에니어그램 성격테스트를 다시 해본 적이 있는데 성격이 백팔십도 변한 것으로 나와서 꽤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남편은 거의 퇴화해 화석화되던 내 유머감각에 인공호흡을 시켜주어 어느 정도는 되살려놓은 듯하다. 남편과 함께 있는 주말엔 정말 나도 모르게 아이디어 많고 까불어대던 고교 1-2학년 시절의 내가 종종 소환된다. 리엑션이 비범하게 좋아 전문 방청객 저리 가라 하는 남편도 어느새 무대로 올라와 내 상대역을 곧잘 소화해낸다. 예전에 “으메~ 기죽어, 으메~ 기살어‘하던  ‘쓰리랑 부부’처럼 우리는 유머를 주고 받으면서 우리만의 2인극을 하며 요절복통한다. 핑퐁 개그가 계속되면서 가뜩이나 웃음이 많은 남편은 거의 자지러지는 수준으로 웃고, 그 모습에 나도 더 흥이 나면서 웃음이 많지 않았던 나도 남편처럼 잘 웃는 사람으로 개조되고 있다. 

     

남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때론 청출어람의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노래방 가서 노래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나는 자연인이다’만 줄창 재방 삼방까지 보는, 전형적 중년취향의 남편은 3년 전부터 가을마다 금요일 밤에 티비 앞에 앉아 ‘쇼미더머니’ 본방 사수를 하는 아내 탓에 강제로 힙합에 입문한 이후 남편은 두해 연속으로 우승자를 맞추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방송 초기 아직 20명 이상이 살아남았을 때 맞춘 것이니 남편의 학습능력도 상당하다고 할수 있다. 어느 때는 나보다 더 위트가 있고 흥도 있는 남편은 겉으로 보면 잔잔하고 호수 같은 스타일의 중년인데, 특이한 아내와 살다보니 남편도 잠재돼 있던 흥이 나오나보다. 이렇게 남편 앞에서는 업되는 ‘조증 아내’와 비상한 리엑션으로 상대를 더 업되게 만드는 ‘수다 유발자’인 남편으로 구성된 우리 부부는 누가 돈을 줄테니 해보라고 해도 못할 이런 놀이로 주말이 행복하다. 그렇게 깔깔 대며 금요일 밤부터 흥으로 보내는 우리 부부는 그 덕에 눈가에 주름이 좀더 깊어졌고 맥주 배가 좀더, 아니 많이 튀어나왔다.       


만난지 6년, 결혼한지 5년째가 된 지금까지 조금도 애정 전선의 탈선이나 느슨해짐 없이 행복한 중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 부부는 우리의 행복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늘 상기하며 산다. 이제 청춘도 아닌데 아까운 남은 시간들을 오로지 행복하게 사는 일에만 써야 한다는 것에 서로 깊이 공감하고 이를 실천하면서 산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여행도 자주 가고 맛집 탐방도 자주 한다. 한마디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들을 주저 없이 실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

      

어느날 남편에게 주위 친구들에게 우리 부부 얘기 하냐고 물어보니 남편 왈, “말하고 싶어도 못해, 모두 상상도 못하는 일일거야, 중년 부부들에겐...” 한다. 특히 내 캐릭터가 50대 여성으로서는 우주 최강 캐릭터일 거라고... 칭찬인지 뭔지 모를 내 특별함을 추켜세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은 이렇게 가장 좋은 나를 끌어낸다.      

어느날 남편을 소개해준 장본인이며 오빠처럼 친밀한 교분을 25년동안 맺고 있는 지인분이 애교이야기를 하다 내가 애교가 별로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펄쩍 뛰며 나는 “무슨 소리? 저요 애교의 화신이예요!” 했다. 마침 남편과 같이 있었던 자리라서 남편 역시 “맞아, 애교 정말 많은 사람이야”하고 맞장구를 쳐줘서 일동이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이때 알았다. 사회적으로 보여지는 나와 남편에게 보여지는 나는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것을.... 사랑하는 연인, 특히 배우자에게 나타나는 내 자아와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내 자아 중 어느 것이 진짜 내 자아일까? 물론 남편에게 나타나는 내 자아가 실제의 나와 일치할 것이다. 나와 잘 맞는 영혼의 단짝과 함께 살다보면 원래 있던 자아인데 인지하지 못해 숨어있던 자아 중 좋은 자아, 바람직한 자아가 점차 부정적 자아를 쫒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남편을 만나고 내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지, 흥겨운 사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애교 역시도 나 자신도 내가 이렇게 애교가 많은 사람인지 50평생을 모르고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나는 애교가 많은 사람이었다. 원래 애교가 많았는데 그게 나를 알아주지 않고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발현이 안되었을 뿐... 남편이 6년전 내게로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원래의 애교 많은 꽃이 된 것이다.  


중년에 부부가 된다는 것은 제대로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며 그 알아봐줌은 세월이 주는 두 사람의 경험치와 융합되어 편안함과 감사한 일상을 선물받는 것인 듯하다. 결코 수명이 긴 탓에 남은 시간을 같이 해줄 적당한 생활의 파트너를 찾는 차원이 아니고, 나이 들어 눈이 밝아진 둘이 이제야 쓸데없는 자존심 내려놓고 서로 마음껏 사랑해주고 보둠어주는 성숙한 인격체로서 만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차원에서 중년 결혼, 만혼을 권장한다. 성숙해진 둘이 만나 아낌없이 사랑해주면서 최선의 자신을 발견하게도 해주는.... 놀라운 성장 경험을 안겨준다. 행복감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여전히, 꽤 소신있는 중년, 만혼 예찬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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